[이달의 책 90] 설이
[이달의 책 90] 설이
  • 서영민 기자
  • 승인 2019.03.2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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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심윤경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펴냄

최근에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학벌이라는 계층사다리를 이용해서 우리사회 상류층을 욕망하는 사교육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에 공감했을 것이다. 이 소설도 설이라는 주인공의 성장소설인데 스카이캐슬 드라마와 오버랩 되는 장면들이 많다. 작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모가 아이를 억압하지는 않는지? 보육원 출신 설이가 또래 집단으로부터 또는 또래 집단의 엄마들에게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 공부를 잘하는 것인지? 묻고 있다. 설이는 때로는 말을 하지 못하는 함묵증이라는 무기로 자신을 방어하면서 세상과 헤쳐나가고 있다. 내가 설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서영민 홍보국장 yms@ko-ba.org

 



사실 요즘 너무 지쳐서, 생각이란 것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무얼 하는지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이모가 먹을 것을 들이면 조금 먹고,  TV를 보거나 잠을 자거나, 잠도 오지 않으면 예전에 보았던 TV 프로그램을 멍하니 떠올렸다. 감정과 생각을 모두 두꺼운 담요에 똘똘 말아서 땅속 깊은 곳에 파묻어버린 것과 비슷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흑백 화면을 보는 것처럼 무심하게 일상을 흘려보냈다. p12

►►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의 골치 아픈 모든 상황을 땅속에 묻어버리고 싶을 때. 때로는 현실 도피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그 현실에 저항해서 처절하게 굴복하는 상황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설이는 미국인 가정집에 입양됐다가 파양된 충격을 말을 하지 못하는(안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함묵증이라는 무기로 자신을 방어한다.

 

우리가 있는 공간에는 어디에나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들이 지나간다고 한다. 라디오 파장, TV 파장, 휴대폰 파장, 인공위성에서 날아오는 GPS 파장까지. 마치 우리가 성긴 솜사탕 무더기나 흰 구름인 것처럼 파장들은 우리를 쑥쑥 통과해 마음대로 지나다니고 있는 거였다. 마치 우리가 성신 솜사탕 무더기나 흰 구름인 것처럼 파장들은 우리를 쑥쑥 통과해 마음대로 지나다니고 있다는 거였다. p17

►► 침대 머리맡에도 휴대폰을 놓고 잠드는 것이 현대인의 일상이다. 이제 지도를 보고 운전해서 길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편리해지는 만큼 더 바보가 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전화번호 열 개 이상을 외우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조그만 전화번호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수 십 개 전화번호를 외웠던 기억력은 사라져버렸다. 무수한 파장들 속에서 무수한 카메라들의 감시 속에서 살고 있다. 파장과 감시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을 찾기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그 상상이 주는 격렬한 희망과 절망에 나는 홀로 폭포수처럼 울곤 했다. 내 상상속의 혈연이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흔들릴 수 없는 자연의 힘이라서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던 나의 엄마나 아빠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과거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며 나를 힘껏 껴안곤 했다. 나를 쓰레기통에 넣은 사람이 그런 포옹을 한다는 게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데도 나는 무안함을 애써 떨치며 길거리 상봉의 희망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p88

►► 설이는 나중에야 진실이 밝혀지지만 자신이 보육원 앞 음식물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고 성장하면서 괴로워한다. 유전자 정보가 보편화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혈연을 찾는 경우가 왕왕 해외토픽으로 보도 된다. 혈연이 평생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고 또 힘이 되기도 한다. 저마다 혈연의 끈끈함은 다르다. 아이를 낳지 않아 혈연을 이어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있는 혈연을 절연하고 애써 외면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떤 모습의 혈연관계 속에서 서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아마 아픔과 슬픔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나 보다. 되든 안 되든 어쨌거나 그게 내 소망이었다. 내 피부에는 무수히 많은, 보이지 않는 안테나가 돋아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픔들을 감지하고 경계했다. p101

►► 어린 설이가 자신이 음식물쓰레기통에 버림받았다는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피해버리고 싶었을 때도 많았을 것이다. 자신의 아픔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들은 소소한 일에도 힘들어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상대의 아픔도 예민하게 감지하기 때문에 공감능력이 뛰어난 경우도 많다. 나중에 설이는 곽은태 선생님의 아들 시현이가 부모와 겪는 갈등과 고민을 이해하고 친구가 된다. 

 

정말이지 속상한 날이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너무 힘겹게 찾아오고 너무 쉽게 사라졌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원장님이 그렇게 바랐던 대로 앤더슨 가족에게 입양되었다면 이런 옷들을 아주 쉽게 입을 수 있었겠지. 난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는 얘였다. 사기꾼 같은 인간들에게 입양되었다가 파양당하고, 좋은 가정에 입양되었다가도 무슨 문제가 생겨 돌아오곤 했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망하는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p108

►► 보육원 아이들에게 입양됐다가 파양되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이다. 버려졌던 아이들이 다시 한 번 버려진다는 충격과 커다란 희망을 품고 떠났던 보육원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떠할까? 차라리 입양이 늦어지더라도 어른들이 신중하게 파양은 막아야 한다. 힘든 날은 몸이 가라앉는다. 소중한 것은 쉽게 사라지고 성공과 희열은 잠깐 점을 찍고 지나간다. 성공하면 더 큰 성공을 바라게 되고, 성공이 지속되면 더 이상 희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곽은태 선생님의 시선은 오로지 시현에게만 못 박혀 있었다. 내가 시현의 바로 곁에 있는데도, 눈길이 스쳤는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단호하게 시현에게만 눈길을 못 박고 사라지는 덩치 큰 뒷모습이 내 가슴에 아련한 생채기를 남겼다. 그렇게 자기 아이만 바라보는 사람, 그것이 아마도 진짜 부모일 것이다. p126 

►► 병원에서는 설이를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살갑게 챙겨주던 곽은태 선생님이 막상 자기 자식인 시현의 문제를 앞두고는 설이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한 맹목적인 절대적인 부모의 시선이 설이는 얼마나 그리울까? 예전에는 내리사랑이라고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식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했지만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부모가 자식을 케어 해야 하는 시간보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자식이 부모의 노년을 지켜봐야 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물론 각자 홀로서야 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속하지 못할지언정 그런 세계와 그런 사람들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언젠가 운이 좋아지면 어쩌면 우리도 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중요했다. 곽은태 선생님은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눈에 보이는 희망이었다. 우리 마음속에 있던 그 작고 보잘것없는 평화의 세계가 와장창 깨진 것은 부러진 뼈보다도 더 크고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었다. 곽은태 선생님이 비참한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잘못해서 사죄하는 쪽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p145

►► 외롭고 힘든 설이에게 항상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곽은태 의사선생님은 설이의 안식처였다. 그러데 하필 설이의 출생의 비밀을 반 친구들에게 까발리고 놀린 아이가 곽은태 선생님의 아들 시현이었고 설이는 시현과 심하게 싸우다 갈비뼈가 부러졌다. 사람들은 계층과 연대를 만들어 낸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있을 때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집단이 만들어낸 용기랄까 묘한 힘이 있다. 계층과 계층이 싸우고 투쟁하는 것이 민주주의 역사이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 멀리 신라시대 6두품 제도를 보더라도.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떠나서 그런지, 아코의 마지막 모습은 편안해 보였단다.
실은, 아코가 낫다고 생각했어. 개들은 아주 단순하고, 그래서 사람보다 훌륭한 때가 있거든. p193

►► 아코는 설이가 유기견을 데려와서 사랑을 쏟으며 키웠던 개다. 설이가 입양되자 날마다 엉엉 울다가 미친 듯이 설이를 찾아 헤매다가 차에 치여 죽었던 것이다. 개들은 사람보다 변덕이 심하지 않을뿐더러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변함없이 반겨주는 것을 보면 주인입장에서 이보다 훌륭한 친구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일 것이다. 

 

풀잎보육원에 있을 때, 그분의 친구나 가족이 찾아오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사람이 일하느라 바쁠 때는 늘 그런 법이야. 주변에 사람이 많고 시간이 없지. 그러니 외롭다고 느낄 이유도 시간도 없어.
하지만 일이 끝나면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날 일도 없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계속되지.
사람이 외롭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단다. p196

►► 설이를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했다고 기자와 언론플레이를 했지만 보육원에서 설이를 아끼고 교육하는데 정성을 쏟았던 보육원 원장님 이야기다. 사람들은 그래서 은퇴하면 갑자기 외로움을 느끼고, 사별하면 외로움을 느끼고, 연인이나 친구와 절교를 하면 갑자기 외로움을 느낀다. 우리가 외로워지는 때가 왔을 때도 외롭지 않으려면 외롭지 않을 때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나서 행복한 추억을 쌓아야 한다.

 

나는 세상의 부모와 자식들에 대해서 대단한 착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곽은태 선생님의 어깨는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위에서는 나비 한 마리도 중심을 잡기 힘들 것 같았다. 어딘가 흔들림 없는 곳이 있을 거라고 간절하게 꿈꾸었던 나는, 또 다시 꿈조차 빼앗겨 얼얼한 뺨을 마른 두 손으로 거칠게 비볐다. 꿈을 빼앗기는 건, 그 무엇보다 고통스럽다. p228

►► 부모입장에서 세상사는 태도와 타인을 대하는 가치관을 자식에게 일치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싶지 않다. 병원에서는 누구보다 훌륭한 인성과 자유로운 교육관을 지닌 곽은태 선생님도 막상 자기 아들에게는 너그러울 수 없었다. 자수성가 하다시피한 자신과 비교하며 시현을 소위 말해 사회적 성공의 길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내 꿈은? 또 꿈 너머 꿈은, 절망스런 상황이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다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다는 말에 동의한다.

 

시현에게 물었지만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죽은 지 한 계절이 넘은 아코를 파내는 것은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먹다 남은 옥수수나 핫도그라도 찾아내면 또 어쩔 것인가. 세상에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끝까지 확인하지 못하고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어떤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코와 나의 마지막 인사가 바로 그런 야속한 일에 속했다. 그냥 여기까지, 여기까지였다. p238

►► 설이가 아코의 무덤을 파헤쳐서 아코의 사체일부를 확인한다고 해서 아코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그냥 그곳이 아코의 무덤이라고 인정하고 아코를 추모하면 된다. 이미 일어났거나 내가 어쩔 수 없는 이별과 슬픔은 세월이라는 기차를 태워 흘려보내야 한다. 극복될 수도 없는 감정들은 흘려보내 버리는데 익숙해지자. 여기까지로 종지부를 찍는 연습을 하자. 여기까지 하자. 할만 큼 했다. 세월의 기차를 태워 보내자.

 

아기 때부터 네 배의 중심에는 나침반이 딱 서 있었어. 그걸 보고 생각했지. 아, 이 아이는 방향을 잃어버릴 일이 없겠구나. 그러니까 난 아무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겠구나. 넌 항상 네가 원하는 걸 알고 찾아갔거든. 나침판은 처음엔 많이 흔들리지만, 결국 옳은 방향을 향하니까. p247

►► 설이는 그런 아이다. 옳은 방향을 찾아가는. 누구나 인생의 방향을 잡기 전까지는 흔들리는 나침반처럼 고뇌하고 흔들릴 수 있다. 그럴 때 참견하지 말고 가만히 방향을 잡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누구도 살아보지 않은 게임이기에 누구도 절대적인 판단을 있을 수 없다. 지금 내가 흔들리는 것은 방향을 잡기 위한 나침반의 처절한 몸부림처럼 옳은 방향을 잡는 과정일 뿐이다.

 

눈물은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린 것을 향한 억울함과 안타까움을 모두 실어 떠나보내라고 흐르는 투명한 강이었다. 사랑인지 욕심인지, 감사인지 미움인지 집착하느라 피가 나도록 움켜쥔 두 주먹이 강물 속에서 스르르 풀렸다. 나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가는 맑은 물을 보았다. 이제는 모두 떠나보내고 그저 울 때이다. p257

►► 울고 나면 후련해 질 때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억울함과 슬픔을 눈물 속에 녹여냈기에. 인생의 작은 부분까지 어디 하나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있던가?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모두 떠나보낸다. 나 또한 누군가가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떠나보낸 존재였다. 설이가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도, 자신이 갈망했던 부모에 대한 사랑도 아코에 대한 기억도 모두 떠나보내고 자신이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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