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92] 운명을 거부하는 제주여인의 지독한 사랑 비바리
[이달의 책 92] 운명을 거부하는 제주여인의 지독한 사랑 비바리
  • 서영민 기자
  • 승인 2019.06.0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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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거부하는 제주여인의 지독한 사랑
비바리


고봉황 장편소설, 왕의 서재 펴냄.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지 71년째인 올해 처음으로 국방차관과 경찰청장 등 정부조직 수장들이 공식적인 사죄를 했다. 무고한 양민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무참히 죽어갔다. 이 소설은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강인해질 수밖에 없었던 제주여성의 사랑을 그렸다. 비바리란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하는 처녀. 또는 제주사투리로 아직 시집을 안간 다 큰 처녀나 아가씨를 칭하는데 넓게 해석하면 제주여성을 칭한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이야기다. 제주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1948년부터 2005년까지 ‘지하’ 제주여성의 삶의 궤적을 풀어내고 있다. 390여페이지의 책장을 덮는 순간 감동의 눈물을 안겨주는 책이다. 역사적 아픔의 제주와 엇갈린 사랑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서영민 홍보국장 yms@ko-ba.org
 


 

                        
목포를 떠난 여객선 하나가 검은 바다를 가르며 제주도로 향했다. p09
▶▶ 소설의 이야기의 첫 문장을 써내려가기 위해 작가는 몇 날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열아홉 주인공 지하는 서울에서 유학하다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고향 제주를 향하고 있다. 제주, 여객선, 검은 바다라는 단어에서 세월호가 떠오른다. 우리 모두에게 너무 깊은 상처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강한 불빛이 두 사람의 눈앞을 가렸다. 경찰의 지프에서 쏟아지는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다. 두 사람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뒤에는 바다가 있고, 앞에는 경찰이 있었다. 그들은 꼼짝없이 포위되고 말았다. p32
▶▶ 주인공 지하가 운명적으로 빠져든 사랑, 장시원과 경찰에 체포되는 장면이다. 육지에서 의 고립은 사면을 포위해야 하지만 제주는 섬이다. 바다라는 장벽이 고립을 더 쉽게 만든다. 포위하는 쪽에서는 그만큼 포위망을 좁히기가 쉽다는 것이고 도망자 입장에서는 탈출이 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서북청년단(서청)이라는 단체가 제주로 흘러들어 왔다. 서청 단원들은 처음엔 엿을 팔더니, 나중에는 태극기와 이승만 박사의 초상화를 사라고 강요하며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마을 청년들은 경찰의 탄압과 서청 단원들을 피해 한라산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p61
▶▶ 제주 말에 ‘육지 것들’이라는 말이 있다. 배타적으로 육지에서 온 사람들을 부르는 말인데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서북청년단처럼 육지에서 온 세력들에 의해서 핍박받으면서 생겨난 말이리라. 4.3 사건은 육지 것들이 합세하면서 그 희생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당시 제주 인구의 1/10인 3만여명이 죽음을 당했다. 생각해 보라. 서울에 인구가 천만명이면 백만명이 죽었던 비극적인 참사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 노인이 6.2%나 차지하는데 이들이 사상적으로 빨갱이라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이런 한과 아픔을 안고 제주사람들은 숨죽이면서 살아왔고, 김대중정부 들어서야 겨우 정부에서 4.3 사건의 존재를 인정했고, 2019년 들어서야 경찰과 군이 공식 사과한 것이다.

죄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무장대로 오인돼 부지기수로 잡혀갔다. 중산간 지대를 서성인다는 이유로 끌려가고, 한라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끌려가고, 마소를 먹이러 갔다가 끌려갔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빨갱이가 아니냐는 의심이 전부였다.  p37
▶▶ 제주에 가면 경치 좋은 곳만 찾아다니지 말고 4.3 공원과 기념관에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거기 갓난 아이를 안고 죽어간 엄마의 동상이 있다. 죽어간 이들의 수많은 이름이 마을별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들에게 넘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일단 불태우고 죽이고 빨갱이라고 우기면 되는 학살이 자행됐다.

대부분의 동굴에는 중산간 마을에서 살다가 수색을 피해 올라온 민간인들이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좌익이고 우익이고, 이념이고 조국이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p74
▶▶ 중산간 초지에서 대규모 목장을 하는 지하의 집안이 4.3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고, 주인공 지하는 그 때 너무도 어린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과 오빠의 죽음을 겪게 된다.

난리 통에 아들을 떠나보내고, 느닷없이 두 여자가 그녀에게 의탁해왔지만, 오순손은 이것 역시 인생의 한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p115
▶▶ 오순손은 제주 해녀로 지하가 사랑했던 부시원의 어머니이다. 지하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부시원을 살리기 위해서 강두식이라는 악질형사와 강제 결혼을 하게 되고 폭행에 시달리게 된다. 지하네 집안에서 부리던 일꾼이었던 귀숙은 부시원과 사랑으로 부시원의 아이를 갖게 되는데 불행히도 아이를 출산하고 사망하게 된다. 지하는 부시원을 사랑했고 부시원은 귀숙을 사랑했다. 안타깝게도 사랑이 엇갈린다. 그런 귀숙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시원의 어머니인 오순손에게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지하는 허리를 숙여 푸르게 돋아난 목초 한 움큼을 땅에서 뽑아냈다. 제주 땅의 검은 흙이 고스란히 뿌리에 묻어 있었다. 지하는 목수건을 풀어 그것을 통째로 싸서 가슴에 품었다. p145
▶▶ 엄청난 사건과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서도 지하가 살아야겠다는 강렬한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초롱(지하가 끔찍이 아꼈던 말)이가 뛰놀던 제주의 초원, 그 땅을 찾겠다는 일념이었다. 역사적으로 고려 충렬왕 이후부터 제주에서 말이 방목되었다고 전해진다. 몽골사람들이 초원이 넓고 기후가 온난하여 말 방목이 유리한 제주에 본격적으로 말을 키웠다고 한다.

지하가 니가타 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만경봉호가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하고 있었다. 지하는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를 헤치며 부시원의 이름을 불렀다. 지하는 사람들을 밀치며 무작정 배 앞쪽으로 다가갔다. 환송 인파가 흔들어 대는 인공기 때문에 자꾸 시야가 가려졌다. p167
▶▶ 이 장면은 지하가 꿈에도 그리던 사랑하는 사람 부시원을 만나기 위해 니카타 항구로  달려간 장면이다. 지하는 부시원을 확인했지만 안타깝게도 만경봉호를 타고 있던 부시원은 지하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역사적으로 재일 한국인이 일본에 살게 된 것은 오래전 백제가 멸망하고 그 후손들이 일본에 가서 자리를 잡고 세월이 흘러 일본인화가 되어버렸다. 그 후 일제시대 징용과 유학 사업 등등을 이유로 일본에 가서 해방이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우리 정부보다는 북한이 먼저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주고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교육을 시켜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시원은 조선학교 선생으로 일하다가 자연스럽게 북송선을 탄 것이다.

“제주 땅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제 아들 녀석을 위해서라도 가려고요. 아들놈한테만 빨갱이 피를 이어받았단 소릴 듣게 하고 싶지 않아요.” p223
▶▶ 분단은 민족의 비극인데 분단된 현실에서 남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엄청난 차별을 가했다. 불행히도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정적을 제거하거나 정당한 항의 시위를 진압하는데 빨갱이만큼 쉽다는 것을 알았다. 월남파병을 떠나는 남기동은 지하가 4.3사건 때 고아가 됐고 지하의 도움을 받았고 서로 남매처럼 의지하면서 살던 인물인데 가족이 억울하게 죽은 것도 원통한데 평생 빨갱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가야 하고 그 자식들까지 연좌제로 공직에 진출할 수도 없었다.

지하는 멀리 보이는 물영아리 오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의 소유가 된 수망리의 너른 목초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초록의 풀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사이로 떠나간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아버지와 오빠가 그녀를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말들이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풀을 쓰다듬어보았다. 맨발로 땅을 밟고 걸었다. 땅의 부드러운 그녀의 발을 감싸는 듯했다. p280
▶▶ 제주에는 아름다운 360개의 오름이 있다. 오름에는 자연동굴도 있지만 일제가 제주를 군사요새로 만들기 위해서 파헤친 수많은 동굴들이 있다. 일제에 의해 한번 동굴을 파는 징용에 끌려가면 7~8년씩 육지를 밟지도 못하고 컴컴한 어둠속에서 동굴을 팠다고 한다. 제주 오름은 눈부시게 아름답기도 하지만 속살에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마치 주인공 지하처럼.  

우찬은 한 여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평생 잊지 못한 여인. 그는 오사카에서 만난 지하가 가슴에 품고 있던 목초 한 뿌리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냄새의 추억이 그리고 뿌리치지 못한 단 하나의 약속이 그를 다시 이 땅으로 이끌었다. p320
▶▶ 우찬은 지하네 목장에서 말을 관리하면서 살아가는 태우리의 아들이다. 지하와는 주인집 아가씨와 하인의 관계였다. 하지만 우찬은 평생을 지하만 사랑했다. 그리고 지하가 위기에 처할 때 우찬이 목숨을 구한다. 지하가 강두식과 강제결혼과 폭행으로 임신해서 낳은 딸 강진이 부시원과 귀숙이 낳은 아들 부건과 사랑에 빠져 일본으로 도피했을 때도 우찬은 지하를 닮은 진이를 도와주고 자신의 호적을 빌려주어 위장결혼으로 진이를 보호한다. 지하는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딸까지 능욕한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되지만…. 우찬은 평생 지하만을 사랑한다. 진이 낳은 딸 미호의 아빠가 되어주면서 미호를 훌륭하게 키워내고 야쿠자 두목으로 일본에서 사업에도 성공한다. 말년에 제주로 돌아와 지하에게 송씨 가문이 원래 가졌던 모든 땅 중 지하가 소유하지 못했던 절반의 땅을 지하에게 찾아준다. 지하의 굴곡진 제주여인의 삶도 가슴 아프지만 미천한 신분으로 우직하게 한 여인만을 사랑하다가 죽어간 초원의 남성 우찬의 삶도 애잔하기만 하다.

자신의 인생을 옭아매는 것 같은 섬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러나 결국 바다를 건너 떠났던 고향에 자신의 발로 되돌아오게 됐다. p366
▶▶ 우찬이 그랬다. 그래서 벗어났지만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고향은 그런 곳이다.

“살암시면 살아진다.”
그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지하의 귓가를 오래도록 맴돌았다. 제주 땅에 모진 바람 맞으며 살다간 비바리들이 건네는 말이었다. 살다보면 살아진다. 지하는 그 말을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지난했던 과거도 모두 살아내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았다. p388
▶▶ 제주 여성들의 견뎌내는 힘이다. 바다 속에서 숨을 참고 희망을 건져 올리는 제주 여성들의 삶은 강인하다. 강인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강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제주라는 섬은 여인들에게 조선시대까지는 떠날 수도 없는 한 많은  땅이었다. 왕이 제주의 영웅 김만덕에게 소원을 물었을 때 제주를 떠나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니, 제주여인들에게 제주는 떠날 수 없었던 살다보면 살아지는 섬이었다.

지하가 꿈꾸었던 옛 송씨 가문의 광활한 목장이 오름 아래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초록 들판으로 생명력이 넘쳐나는 말 떼가 질주했다. 어디선가 말을 쫓는 우찬의 힘찬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p390
▶▶ 이 소설은 그래도 엇갈린 사랑의 주인공인 우찬과 지하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부건의 양아들 성모와 강진의 딸 미호가 가족으로 사업파트너로 묶어지면서 희망적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소설을 읽다가 우찬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지하가 우찬의 무덤을 쓰다듬는 장면에서도 울컥하고 말았다. 이 소설이 꼭 영화가 되어서 스크린에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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