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108 - 당신을 찾아서
이달의 책 108 - 당신을 찾아서
  • 서영민 기자
  • 승인 2020.11.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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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찾아서

정호승 시집, 창비 펴냄

가끔은 시집을 읽고 싶을 때가 있다. 시는 때로는 비온 다음날 청명한 하늘같기도 했다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기도 했다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애틋함이기도 하다. 푸른 숲속에서 일정한 리듬으로 흐르는 계곡물처럼 시는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기도 한다. 일흔을 넘긴 시인의 언어는 바다에 다다른 강물처럼 긴긴 길이의 인생이 녹아 있다. 때마침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바람이 시인에게 더 다가가고 싶어졌다. 
                                               서영민 홍보국장 ymseo36@hanmail.net

산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면 된다. 
p18 ‘개똥’ 중에서
▶▶ 가지는 않고 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랑도 그렇고 우정도 그렇고 돈도 왜 그렇게 꼭 서운한 감정들과 억울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던지. 모든 것들이 오지 않으면 한 발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면 될 일이다. 여타의 감정들은 내려놓아야 한다. 

누군가가
비가 오는데 
진흙으로 만든 의자 하나 가져와
나더러 앉으라고 한다
소나기가 퍼붓는데

앉고 싶지 않아도
앉아야 하는 의자
언젠가 단 한번은 
앉지 않으면 안 되는 
진흙 의자
p21 ‘진흙 의자’ 중에서  
▶▶ 시인처럼 고희를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비도 왔고 눈도 맞았고 청명한 햇빛이 들기도 했고 먹구름이 몰려와 세찬 소나기도 맞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명상으로 달래며 “그래 너 잘 하고 있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사람 사는 일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는 받아들이는데 내가 왜 진흙 의자에 앉아야 하는지 반문하며 방황했었다.  

이제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봄은 언제나 기다리지 않을 때 왔다
겨울은 봄을 준비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겨울을 살기 위해서 있다
p52 ‘백송(白松)을 바라보며’ 중에서 
▶▶ 지금이 인생의 겨울일지라도 삶이라는 숭고한 여정인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보면 겨울이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인생의 봄인 경우도 많다. 현재를 살아가는 삶처럼 위대한 여정은 없다. 

비온 뒤 거리로 기어나온
달팽이처럼 기어갑니다
월급을 받으러 기어갑니다
대출이자를 내려고 기어갑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거짓 기도하러
명동성당으로 기어갑니다
조계사에도 들러
불전함에 돈도 넣지 않고 삼배를 올리다가 
부처님 기침 소리에 놀라 
도망치듯 기어갑니다
p73 ‘자서전’ 중에서 
▶▶ 월급쟁이 소시민의 삶이 달팽이처럼 기어가야 하는 운명이다. 대출이자도 내고, 거짓 기도지만 종교에 의지하고 싶어 한다. 나 또한 사업을 해보지 않아서 월급쟁이의 사고에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미래는 복수에 있지 않고 용서에 있으므로
가슴에 활활 격노의 산불이 타올라도 
산불이 지나간 자리마다 잿더미가 되어 
잿더미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
화해하는 숯의 심장이 되라
용서의 불시를 품은 참숯이 되라
p87 ‘숯이 되라’ 중에서 
▶▶ 신앙심이 깊지 않아서인지 어떤 이를 진정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애써 무시할 수는 있지만 용서하기 싫은 인간들이 너무 많다. 분노로 타오르더라도 잿더미가 될지라도 자기 자신의 본질을 지켜주는 숯은 남겨야 한다. 다 타버린 것 같지만 불을 피우면 숯은 벌겋게 다시 타오를 수 있다.  

너는 이제 명심해야 한다
겨울이 오는 순간
강심까지 깊게 얼어붙어야 한다
더 이상 가을의 눈치를 보지 말고 과감하게
절벽에 뿌리를 내린 저 바위처럼 단단해져야 한다
너는 강물로 만든 바위이며 얼음으로 만든 길이다
그동안 너의 살얼음을 딛고 걷다가
내가 몇 번이나 빠져 죽었는지 아느냐
살얼음이 어는 강은 겨울강이 아니다
p104 ‘겨울 강에게’ 중에서 
▶▶ 얼어버린 겨울강도 물고기를 품고 있으며, 얼음장 밑으로 숨죽이면서 흐르며 봄을 기다린다. 겨울강 한 복판에서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얼음장 밑으로 미끼를 밀어 넣고 견뎌야 한다. 더 단단해져야 한다. 살얼음을 딛고 건널 필요는 없다. 강심까지 얼어붙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항상 기다림은 내 편이다.  

무엇을 사랑했느냐고 묻지 마시게
누구를 사랑했느냐고 묻지 마시게
사랑할수록 무슨 할 말이 남아 있겠는가
밥이 눈물이 될 때까지 열심히 살았을 뿐
이미 길을 잃고 저만치 혼자 울고 있다네
밤이 깊어가도 해가지지 않아
아침이 찾아와도 별이 지지 않아
혼자 기다리다가 울 때가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사랑했느냐고 묻지 마시게
진실 또한 침묵 속에서 혼자 울고 있다네
p145 ‘시간에게’ 중에서
▶▶ 사랑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눈물이 밥이 되었는지 밥이 눈물이 되었는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세월을 넘어 왔다. 표현하지 않았을 뿐,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 울고 있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세상은 꼭 진실이 승리하지도 않았으며, 진실을 알아주지도 않았으며, 엄청난 노력을 들였지만 결과가 허무할 수 있고, 우연한 횡재를 설명할 방법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샴쌍둥이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누구나 ‘혼자’ 단어 앞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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