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문화탐구⑭ - 제주에서 걸었소, 제주애서 읽었소Ⅰ  
일상문화탐구⑭ - 제주에서 걸었소, 제주애서 읽었소Ⅰ  
  • 김도경
  • 승인 2021.02.0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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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에게.

지금 이 글을 쓰는 곳은 제주 구좌읍 세화리예요. 세화리는 큼직한 고구마처럼 생긴 제주의 동북쪽에 위치한 지역에 있어요. 제주의 오름 중 가장 높은 오름인 다랑쉬 오름과 천년의 숲이라 불리는 비자림이 있는 중산간 마을이죠. 지난 글에서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라는 안부를 건넸었지요. 그 글을 쓸 당시만 해도 계획에 없었던 제주 한달살이를 1월 초부터 하고 있어요. 1박 2일도 아니고 한 달을, 그것도 전국에 쏟아진 엄청난 폭설을 뚫고 투우사를 향해 내달리는 소처럼 달려왔다지요. 이왕 이리된 김에 2월호와 3월호에서 ‘이쪽, 제주에서 머무는 풍경’을 뷰티엠 독자들에게 편지글로 전해볼게요. ‘그쪽의 풍경’을 물었으니 ‘이쪽의 풍경’을 화답하듯이 말이죠.

 

▲ 그림 구좌읍 세화리 길에서 만난 말/사진 김도경
▲ 그림 구좌읍 세화리 길에서 만난 말/사진 김도경

M.
‘풍경’이란 단어에도 여러 뜻이 있지요. 풍경이 ‘風景’일 때는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을 뜻하는 어떤 정경이나 상황을 뜻해요. 풍경이 ‘風磬’이 될 때는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으로 보통 종 안에 붕어 모양의 쇳조각을 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소리가 나게 하는 물건을 뜻하지요. 풍경을 ‘諷經’으로 쓸 때는 불교에서 경전을 소리 내 읽고 외우거나 예배하는 일을 뜻해요. 연말 내내 야근하며 가까스로 진행중인 일을 마치고, ‘셀프 해고’ 후 떠나온 제주. 이곳에서 풍경(風景)은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내 육신이 작은 쇳조각이 되어 풍경소리가 되네요. 쪽빛 바다가 몸을 때려내는 파도 소리가, 외투에 눈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풍경(風磬) 소리처럼 들린답니다. 그 소리는 또다시 내게로 들어와 풍경(諷經)으로 전환되며 이미 지나온 날들은 지나온 모습대로 인정하고 보듬으려 애씁니다. 이제는 아직 살아내지 않은 미지의 날들에 집중해야겠어요. 나라는 사람이 어떤 풍경으로 살아갈 것인지 내 삶의 경문을 소리 내어 읽어보려 해요.

M.
걷는다는 것. 걷기는 정방향의 보이는 모습만이 아닌 뒷면, 옆면, 윗면 그리고 땅이 내 발바닥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입체적인 풍경을 느낄 수 있는 역동적인 감각이죠. 보는 제주도 좋지만, 몸으로 걸어 움직이며 다가가는 제주는 더 좋아요. 제주로 오기 전 거실 한 면에 자리 잡은 고 김영갑 사진 작가의 ‘용눈이 오름’을 보며 상상으로 오르곤 했어요. 머리카락이 엉망이 될 정도로 세찬 바람을 느끼며 몸의 모든 감각 기관을 열어젖히고 만나는 오름은 살아있음의 희열을 선사하네요. 온전히 걸으며 바람의 노래를 들어요. 오름을 오르는데 해안길을 걷는 것인가 자꾸만 헷갈릴 정도로 바람 소리인지 파도 소리인지 정신을 가다듬게 하지요. 평면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길의 풍경이 내 몸으로 흘러들어와 또 다른 풍경이 입체적으로 살아나 버려요. 오름에 올라도 환대하는 이는 없지요. 초자연이 우두커니 늘 있을 뿐이지요. 그저 바람과 파도와 오름과 검은 돌과 초록 머리를 땅 밑에서 올려보낸 무청과 마늘이 걷는 이를 환대하지요. 나는 그 인사를 외면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뿐이지요. 

 

▲ 그림  올레 1코스 알오름 이정표 /사진 김도경
▲ 그림  올레 1코스 알오름 이정표 /사진 김도경

M.
땅의 시간을 오롯이 품고 있는 땅, 제주. 내 발바닥이 서 있을 수 있게 한 이 땅은 켜켜이 쌓인 축의 시간을 지나온 땅이지요. 피로 물든 비극의 역사를 품은 땅. 57년 만의 한파와 폭설이 몰아친 제주의 길에서 보라색 갯쑥부쟁이를 만나고, 황금색 귤밭을 지나고, 청록과 쪽빛의 바다의 노래를 들으며 M에게도 이 순간을 선물하고 싶네요. 지난여름 다친 발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제주에 도착해서도 올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전혀 엄두를 낼 수 없었지요. 발이 너무 힘들지 않도록 천천히 걷기로 나 자신과 약속하면서요. 가능한 짧은 코스를 선별해 주 2회 올레길을 걷기로 하니, 떠날 때는 8개의 올레길을 걷고 떠나겠더군요. 뭐, 완주를 안 해도 좋고 하면 더 좋고 8개가 아닌 4개를 걸어도 괜찮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욕심내지 말고 풍경을 몸으로 느끼며 걷다 가려고요. 걸으며 보는 풍경에 지나온 내 삶이 함께 겹쳐지며 나를 처음부터 읽어 나가고 있어요. 제주에서 걸으며 나 자신이란 책을 읽는 거지요.

M.
어떤 풍경을 만날 때, 행복하고 편안하고 호기심이 올라오나요. 
어떤 풍경에 담겼을 때 더 오래 함께 있고 싶고 더 깊이 바라보고 싶은가요. 
어떤 풍경이 내 삶의 배경이 되어주기를 바라나요.
함께 그 풍경을 보면서 나이 들어가고 싶은 이가 있나요.
무거운 몸을 놓고 이생을 떠나야 할 때 보고 싶은 마지막 풍경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 그림  구좌읍 월정리 바다 /사진 김도경
▲ 그림  구좌읍 월정리 바다 /사진 김도경

M.
내가 좋아하는 풍경은 어떤 것일까. 혹자는 아직도 멀었다 말할 수 있겠지만 반백년을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어요. 제가 던진 이 모든 질문에 풍경의 한 조각으로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었으면 하는 사물이 떠올랐어요. 제게 그것은 ‘책’이더군요. 유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기억나는 장면에 책이 있고, 현재의 나를 관찰해도 나란 사람의 유일한 덕질은 책이더군요. 타자에 의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의 욕구에 의한 것임은 분명해요. 그 덕질은 내 삶의 풍경을 서서히 그러나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물들여 왔어요. 나는 책이 있는 풍경을 가장 좋아해요. 그곳이 어디든 책이 있다면 말이죠. ‘책’이라는 물건, 사물을 좋아했을 뿐인데 어찌 된 일인지 책 짓는 사람이 되어있더군요. 제주에서 길을 걷다가 작은 책을 꺼내 읽기도 하고, 걷지 않는 날에는 바다를 보며 책을 읽어요. 머무는 공간에서도 책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능동적 사물이자, 내 세상을 확장해주는 플랫폼이지요. 제주에서, 제주애서(愛書)를 다시 확인하고 있어요. 책이 담아낸 문장에 유쾌하게 베이고, 유쾌하게 찢기고, 유쾌하게 당하면서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가 보자며.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에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드는 파도 소리에 귀를 찢기웠다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어진 적은 없었다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중 

 


 


김도경
도서출판 책틈 편집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콘텐츠산업
대우증권, SK사회적기업,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등 근무
정부, 공공기관 공공문화콘텐츠 기획개발 및 사업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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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경 2021-04-01 20:03:54
도시속에 꽉찬 모습보다는
바다가 휜이 보이는 넉넉한 사진이
마음을 여유롭게 내어줍니다..
늘 따뜻한 글, 사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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