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문화탐구⑰ - 이사, 익숙한 것과의 결별
일상문화탐구⑰ - 이사, 익숙한 것과의 결별
  • 김도경
  • 승인 2021.04.27 15: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 물결 하나

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
잔물결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서 서울을 떠난 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한강.
어제의 내가 그 강물에 뒤척이고 있었다
한 뼘쯤 솟았다 내려앉는 물결들.
서울에 사는 동안 내게 지분이 있었다면
저 물결 한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결 하나 일으켜
열 번이 넘게 이삿짐을 쌌고
물결 하나 일으켜
물새 같은 아이 둘을 업어 길렀다
사랑도 물결 하나처럼 
사소하게 일었다 스러지곤 했다
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운 것도
저 낮은 물결 위에서였다
숱한 목숨들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이 도시에서
뒤척이며, 뒤척이며, 그러나
한 번도 같은 자리로 내려앉지 않는
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
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
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넸다
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 시, 나희덕 -

서울을 떠나다
끝나지 않았다

나희덕의 시 <저 물결 하나>를 읽는 내 눈동자에 투명한 물결이 한동안 일렁거렸다. 지난 사월 중순, 근무지에 이어 주거지까지 이사를 마쳤다. 순차적으로 서울이라는 익숙한 도시로부터 낯선 도시로 몸을 옮겨왔다. 그렇다. 동네 이름만 들어도 그곳이 어디쯤인지 머릿속 지도가 펼쳐지던 익숙한 서울의 주소지를 소거했다. 같은 날, 슈퍼에 소소한 물건을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을 것 같은 낯설음을 겪었다. 아무렴,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 몸은 이미 이곳에 있지만, 나의 고향인 서울로부터 마음마저 다 빼내 왔다고는 못하겠다. 짐작은 했다. 막상 몸은 옮겨 놓았으나 영혼은 육신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결혼 후 열세 번째 이사다. 그러나 아직 나의 이사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만큼 이사를 했으면 이제 이사가 식은 죽 먹기겠네!”라고 속 모르는 말을 던지지만 천만의 말씀. 나는 아직도 이사가 참 어렵다. 짐 정리의 고단함은 말할 것도 없고 정서적으로도 새로운 정착지에 안착하기까지는 언제나 시간이 더 필요하다. 

 

▲ 그림  영화 Betty Blue 37.2 사진 출처 : 김도경
▲ 그림  영화 Betty Blue 37.2 사진 출처 : 김도경

삶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태어나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내고, 밥벌이를 하는 사회인이 되고, 가정을 이루고 유쾌하면서도 사려 깊은 물새 같은 한 아이를 키웠던 서울이라는 도시, 서울. 육아와 늦깎이 공부를 병행하며 밥벌이를 하느라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헉헉대며 보낸 삶의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든 도시, 서울. 가족관계하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내야 했던 시간이 응축된 도시, 서울.
사람 노릇하며 성실하게 살아내려 노력했을 뿐인데, 삶은 때로 거센 물살로 응답하며 몸과 마음을 헤집어 놓기도 했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잔잔한 물결을 선사해 어리둥절하게도 했던 사적인 역사가 담긴 내 삶의 도시, 서울을 떠나 낯선 도시로 왔다. 

몹시도 담담하고 슴슴한 표정으로 아픔과 기쁨이 뒤섞인 그 애잔한 막다른 골목길을 떠나왔다. 27년간 나와 함께했던 영화 <베티 블루 37.2> 포스터 액자를 건물의 모든 세대가 떠나간 건물의 빈 현관에 걸어두고 몇 번이나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두고 왔다.

 

▲ 그림  사진 출처 : 기호일보
▲ 그림  사진 출처 : 기호일보

햇볕에 드러난
민낯의 사물들

시 속의 그녀처럼 나도 물결 하나를 일으켜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 처음 살아보는 도시에 낡은 살림살이를 풀어 놓았다. 이사를 한 사월 중순은 꽤 많은 봄비가 내린 다음 날이었다. 화창하지만 손끝과 코끝이 싸하게 시린 날씨였다. 열 번이 넘는 이삿짐을 싸고 풀며 낯선 이들에게 내 남루한 살림살이를 길바닥에서 참 많이도 보여주었다. 내 세간들이 처음 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젊은 등에 실려 나가고, 낯선 이들에게 냉장고 속, 옷장 속은 물론 자질구레한 온갖 사물들이 민낯의 얼굴을 드러냈다. 

이사를 앞두고 남길 것, 버릴 것, 나눌 것들을 수없이 분류하며 집 밖으로 내보내며 정리했건만 이사 당일 이삿짐센터의 직원의 “이거 가져가요?”라는 질문에 “죄송해요. 그건 버릴게요.”, “아, 그건 가져가야 해요.”라고 번복하기도 하며 사물들의 운명이 현장에서 바뀌곤 했다. 5t 트럭에 모두 탈 수는 없었으니 손때 묻은 나의 낡은 사물들은 주인장이 이사갈 준비를 하는 내내 몹시도 초조했을 것이다. 동고동락했던 동료 중 누구는 남겨지고 누구는 이미 보내지고, 누구는 재활용장으로 누구는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지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며 견뎌내야 했으리라. 결국 이삿날은 왔고, 이삿짐들은 햇볕에 몸을 내어놓고 트럭에 실려 먼 길을 떠날 마지막 심호흡을 했다. 나는 남겨질 텅 빈 집에서 유난을 떨며 새삼스레 정성들여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내놓고 문을 지그시 잠그며 차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동네에 도착했다. 이삿짐 트럭의 문이 열리고 다시 햇볕에 살림살이들이 와와~소리를 내며 눈부신 속살을 드러냈다. 좁은 공간 어딘가에 필사적으로 자리를 잡기위해 사물들이 “나 어디로 가요? 여기? 저기?”라며 사방에서 자기 자리를 어서 정해달라고 내게 다그치는 것 같았다. 오후의 쨍한 햇볕 때문이었을까. 그 아우성들을 잠시 모른 체하며 나는 햇볕에 드러난 묵은 짐들로 표출되는 내 삶의 역사가 왠지 서글퍼 잠시 햇볕에 눈을 감아 버렸다. 사월의 어느 날 오후, 찰나처럼 짧은 순간 나는 그렇게 소란스러움 한 가운데서 깊은 슬픔을 느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가 있었다.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

- 시, 이문재 -

이사는 참 설레기도 하지만 고단한 몸과 마음의 행위임이 분명하다. 이삿짐 싸기와 풀기, 살림살이들의 제 자리 잡기로 요 며칠이 참 바빴고 솔직히 힘겨웠다. 정서적으로도 이골이 나고 몸 .구석구석이 골병이 드는 기분이 든다. 이 느낌은 어느새 오십 대가 되어버린 내 몸이 느끼는 육체적 고단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이 마지막 문장이 내 마음에 잔물결을 여러 겹 만들며 짙은 여운을 던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사,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첫 번째 이야기를 마친다.


 

김도경

도서출판 책틈 편집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콘텐츠산업
대우증권, SK사회적기업,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등 근무
정부, 공공기관 공공문화콘텐츠 기획개발 및 사업관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123 미용회관 5층
  • 대표전화 : 02-585-3351~3
  • 팩스 : 02-588-5012, 525-1637
  • 명칭 : 대한미용사회중앙회
  • 제호 : BeautyM (미용회보)
  • 대한미용사회중앙회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한미용사회중앙회.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