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문화탐구㉓ - 글, 활자로 나를 펼쳐내는 몸쓰기
일상문화탐구㉓ - 글, 활자로 나를 펼쳐내는 몸쓰기
  • 김도경
  • 승인 2021.10.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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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뭣이든지 키우기 위해 
무성하게 잘 크는 풀을 뽑으니 내가 맘은 안 편하다.
뽑아 놓은 풀이 햇볕에 마르는 것을 보면 
나도 맘은 안 좋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할 수 없이 또 김을 매고 풀을 뽑으며 죄를 짓는다.


반들반들한 도토리를 돌맹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데 자꾸 뛰나가서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

▲ KBS 다큐시선
▲ KBS 다큐시선

 

삶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

원고를 쓰려고 책상에 앉았다. 먼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영사기사 알프레도가 어린 토토에게 선물로 보여주던 장면처럼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루하루 삶을 살아내며 정직하게 기록한 순간들이 모여 글이 되고, 어쩌다 보니 묶여 책으로 세상에 나온 책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떠올렸다. 위 문장은 그렇게 글이 된 삶의 한 장면이다. 낮에는 일하고 해가 저물면 낫을 쥐던 손에 연필을 쥐고 쓴 글이다. 밤이면 책상이 된 밥상에 몸을 구부려 노동과 노화로 굽은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문장이다. 저자의 공책에 누워있던 두 개의 문장은 글이 되기 이전에 저자에게는 ‘그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글자로 펼쳐낸 ‘그 순간들’이 모여 기록된 삶이 되었다. 저자의 글 중에서 나는 이 두 개의 문장을 유독 좋아한다. 하루를 마치며 연필 잡은 굽은 손으로 정성을 들여 글자 연습을 하며 남긴 의도적 왜곡도, 가식도 없이 쓴 정직한 문장에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순수를 느끼기 때문이다.

▲ 그림  출처 : 출판사 책 소개 정보
▲ 그림  출처 : 출판사 책 소개 정보

문장의 주인공인 강원도 양양군에 사는 이옥남 할머니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다. ‘글’로 만났고 ‘글’로 연결되어 떠올렸을 뿐이다.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2018년까지 30년 동안 쓴 일기 일부를 묶어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라는 책에서 만난 글이다. 2018년 한 온라인 사이트에서 진행한 북펀딩에서 이옥남 할머니의 글을 만난 나는 기꺼이 북펀딩에 참여했다. 어릴 적 글을 배우지 못했던 할머니는 빨래하고 밥하며 오빠가 공부하는 어깨너머로 기억해 글자를 혼자 익혔다. 군불을 때며 아궁이 앞에 모인 재에 나뭇가지를 긁어가며 ‘가’ 자 써 보고 ‘나’ 자 써 보며 시작한 글자 연습. 입 하나 덜려고 떠밀려온 시집살이할 적엔 꿈도 못 꾸다가 예순이 훌쩍 넘어 혼자 남겨지고 난 후에야 난생처음 자신의 공책을 샀다고 한다. 삐뚤빼뚤, 연필 쥐는 것도 힘이 들어 글씨 좀 예쁘게 써 보는 연습해볼까 하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모여 30년의 세월이 담겼다. 출판 일을 하는 손자에게 발견된 노트는 한 권의 책으로 전환되어 ‘할머니’가 아닌 ‘이옥남’의 이름으로 모르는 타인들과 아흔일곱 해를 살아온 그녀 삶의 장면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도토리묵을 쓰려고 도토리를 깨는데 자꾸 뛰어나간다며 순간 뱉어낸 욕에 혼자 웃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를 뽑으면서도 죄를 짓는 것 같다 하고, 빨간 강낭콩은 빨개서 예쁘고 그냥 강낭콩은 깨끗해서 예쁘다 했다, 자식들한테 용돈을 받으면 고마움과 함께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하루의 마음들이 공책에 스며들었다. 글을 읽으며 가슴이 따뜻해지고 코가 시큰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선하고 맑은 마음들을 활자로 펼쳐낸 글을 만나며 삶이 어떻게 글이 되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했다. 삐뚤빼뚤한 할머니의 하루하루에는 글쓰기의 어떤 기교도 비법도 기술도 없다. 오로지 자신을 마주하는 성실함과 세상을 향한 따뜻함과 연민이 그 무엇보다 맑고 온전하고 단단하게 채우고 있다. 글쓰기에는 수많은 글쓰기 책과 강의에서 말하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산뜻하게 느끼게 한다.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시인은 어린이들에게 글을 쓰라고 하면 “도대체 뭘 써요, 뭘 쓰라고요?”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라고 한다. 텅 비어있는 종이를 앞에 두고 막막한 것은 그저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글쓰기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해주었다고 한다. “글을 잘 쓰려면 나무를 보세요. 엄마를 보세요. 곁에 있는 그 무엇을 따뜻한 시선으로 계속 보세요.” 글쓰기의 시작은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라며 그것이 곧 글이 된다고 말한다.

글쓰기는 내 몸으로 
통과하는 혼돈의 해독제

▲ 그림  출처 : 김도경 이미지
▲ 그림  출처 : 김도경 이미지

자신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은 살아내며 마주친 수많은 순간을 정직한 묵상을 통해 손끝으로 빚어내는 몸 쓰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만히 있으면 오래도록 기억하고픈 추억도, 가슴 아팠던 기억도 어느새 흩어져버려 애초부터 없었던 ‘부재(不在)의 기억’이 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렁이곤 한다.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일기의 형태가 아니어도 된다. 그저 이따금 내 마음에 일어난 어떤 생각 혹은 어떤 미안함, 어떤 분노, 어떤 그리움, 어떤 간절함, 어떤 사물 또는 지나쳐간 하루의 단상에 대해 짧은 문장으로 남겨보자. 글이 길어야 할 이유도 없다. 마음에 맴도는 것이 있다면 하나씩 천천히 내 마음으로부터 끌어내 활자로 펼쳐내 보자. 처음부터 정돈된 글이 나올 수 없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막 쏟아내 보자. 쏟아낸 후 밀쳐두었다가 다시 꺼내어 나의 시선과 마음을 들여다보자. 

때로는 책장에서 무심코 빼든 책의 한 페이지에서 끄적인 나의 언어로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순식간에 선명하게 복기가 되기도 한다. 겪고 있는 마음의 상처와 혼란으로부터 외부의 힘이 아닌 내부의 힘으로 스스로 회복해 나가는 해독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마치 쇠잔해지며 굽어가는 등뼈를 곧추세우듯 내 몸으로 밀어 기록한 삶으로 나를 새롭게 세워 나아가는 것처럼. 글쓰기는 몸과 마음의 노동을 동반하는 게 녹록지 않은 과정이다. 나에 대해,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글쓰기라는 몸쓰기’를 통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호 ‘내가 아는 나를 아는 사물에 관하여’에 실린 사물 이야기처럼 ‘사물’로 연결되는 나의 이야기를 남겨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사물’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꼬리 잇기를 하며 그다음 글, 그 다음다음 글을 풀어내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쓰다 보면 무심히 지나쳤던, 지나가는 순간 중 어떤 것들은 글로 남겨 그 순간을 한 번 더 살아낸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 남에게서 듣거나 책에서 읽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가 써놓은 이야기에서 어느 순간 내가 영향을 받으며 나를 세워나갈 수 있다. 활자로 나를 펼쳐내며 나를 읽다 보면 천천히 내 몸으로 통과하는 당신 인생의 장면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
못 쓴 페이지는 언제든지 고칠 수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페이지를 고칠 수는 없다.

작가 할란 코벤
 


 

김도경
도서출판 책틈 편집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콘텐츠산업
대우증권, SK사회적기업,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등 근무
정부, 공공기관 공공문화콘텐츠 기획개발 및 사업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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