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 어디로 향하고 있니
음악칼럼 - 어디로 향하고 있니
  • 신은경
  • 승인 2022.02.2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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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에 힘 빼. 어깨도 힘 빼고.”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 선생님께선 레슨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힘을 완전히 뺐더니 피아노를 칠 수가 없었다. 힘을 어떻게 빼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선생님께선 급기야 악보에 ‘RELAX’라고 크게 쓰셨다. 

선생님께선 힘을 빼라고 하셨지만, 피아노와 인연은 팔 힘이 없다는 이유로 맺어졌다. 어머니께서 내 팔 힘이 너무 약하다며, 힘을 기르라고 취학 전 피아노학원에 보내셨다. 여자아이에게 맞는 취미 운동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늘 힘없는 모습으로 일상생활을 하면서 정작 피아노 앞에서 힘을 빼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내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꺼내 본다.

내 위로 부모님과 조부모님께서 계셨고, 밑으로는 동생이 세 명 있었다.
부모님의 금술은 좋은 편이셨지만, 늦된 동생을 혼낼 때는 성난 야수같이 돌변하셨다. 
아버지의 화난 고성과 동생 우는 소리가 일상적으로 반복되었다. 
불안한 기운이 집의 바닥을 스르르 기고 있다가 불시에 원자폭탄처럼 우리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곤 했다.
장녀인 나는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었다.
그런 전쟁이 한 차례 지나가면,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쌀을 흘려가며 씻거나 할머니 귀지를 파드리고 손톱, 발톱을 깎아 드렸다. 
위로 아래로 가족 모두 나의 레이더망에 있었고, 그들의 기분을 다 맞춰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동생을 함께 데리고 간다거나, 학교에서 친구가 사탕을 하나 주면 주머니에 잘 간직했다가 망치로 깨서 동생과 나눠 먹기도 하면서 가족 모두를 챙기려고 애썼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물속의 오리발처럼 마음은 항상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의 입장과 표현보다 상대의 기분이 더 중요했고, 눈치 보기는 공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어린이의 생존모드는 시작되었고, 남을 먼저 살피는 것이 생활화되면서 자랐다. 

중학교 시절 어느 날, 어머니는 날 데리고 시장 옆 작은 옷가게에 데려가셔서 옷을 고르게 하셨다. 나는 아무거나 입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재촉과 나의 침묵이 흐른 후, 결국 어머니가 내 옷을 고르셨다. 그때는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내 의견이나 감정을 사춘기 시절에도 표현할 줄 몰랐던 것이었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도 않고 자신감 없이 지내고 있던 나에게 어느 여름날, 베토벤의 음악이 다가왔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뜨거운 해가 들어왔다. 등줄기를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려 팬티가 흠뻑 젖도록 피아노 의자에 앉아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습했다. 슬프면서도 비장한 의지가 느껴지는 곡이었다. 잘 치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어깨와 팔이 굳었다. 일상의 긴장은 피아노 앞에서도 이어졌다.

릴렉스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적 긴장이나 경직을) 늦추다, 느슨해지다, 긴 휴식을 취하다, 안심하다 등의 뜻이 있다. 마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늘어져 있는 것 또한 릴랙스의 뜻이다. 

하지만 악기를 연주할 때 그렇게 힘을 빼면 손끝까지 힘이 전달되지 않아 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다. 또 몸통에서부터 어깨, 팔꿈치, 손목, 손등, 손가락 모두에 힘을 주어 건반을 누르면, 딱딱한 나무막대기로 피아노를 때리는 것과 같다. 그러면 울림 없이 건조하고 납작한 소리가 난다. 

그럼 악기를 연주할 때 릴렉스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언젠가 헬스장을 다닌 적이 있는데, 누군가 켜놓은 프로야구 중계 화면이 떠 있길래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단단한 근육질의 선수가 발을 땅에 딛고, 공이 날아오자 몸을 비틀어 온몸의 근육을 쓰며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에 공이 맞고 그는 마구 달렸다. 그의 팔은 단단하지만 뻣뻣하지 않았다. 배트는 팔의 연장이었고 배트에 공이 닿는 순간을 위해 그의 모든 근육이 쓰이고 있었다. 
아, 저거구나! 무조건 힘을 빼는 것도 아니고 온몸에 잔뜩 힘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온몸의 근육이 적절한 힘을 갖고 중심을 갖고 서 있어야 했다. 

피아노에 적용해보면 건반은 손가락의 연장이다. 몸의 어떤 근육도 손가락이 움직이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도와주되, 언제나 힘을 쓸 수 있게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 불필요하게 과한 힘은 버리고 손과 가까운 팔은 물론 어깨와 가슴근육, 등근육, 엉덩이까지 손가락을 지원할 준비를 해야 한다. 
과한 힘은 과한 긴장이다. 근육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내겐 음악과 삶이 다르지 않았다. 삶도 마찬가지로 균형점을 찾아야 했다. 나를 중심으로 놓고 상대와 관계를 맺고 배려도 해야 균형이 맞춰지는데, 나는 스스로를 쏙 빼놓고 상대와 관계를 살펴서 몸과 맘 모두 힘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엉뚱한 긴장으로 나를 채웠다. 가슴은 움츠려지고 등은 굽어지고 어깨는 올라갔다. 그리곤 긴장감에 피곤해서 쓰러져 눕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스스로 몸을 치고 있는지 모른 채,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너는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느냐며 어머니는 항상 의아해하셨다. 오랜 시간 내가 주위 눈치 보며 길들인 대가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밖으로 나간 시선을 내게로 거두어들이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릴랙스가 안 되었던 것이 삶의 어떤 부분 때문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지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음악은 그 사람의 가장 농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을 위한 릴렉스를 테크닉적으로도 관찰하는 것 뿐 아니라, 삶의 태도를 면밀히 살피는 일 또한 놓지 않고 있다. 적절한 힘을 갖고 균형잡힌 릴랙스를 찾아가는 중이다. 마음에 균형을 맞출수록 몸에 안정감이 생기고, 음악은 좀 더 자유롭게 펼쳐진다.


  

신은경 

스토리텔링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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