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 쇼팽, 당신은 순수한가요.
음악칼럼 - 쇼팽, 당신은 순수한가요.
  • 신은경
  • 승인 2022.03.2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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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
▲ 쇼팽


‘나이 19세, 내게 사랑이 싹튼다. 그녀의 노래와 함께 연주를 하다니.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차에 몸을 싣고 바르샤바를 떠난다. 그녀에게 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이 괴로운 심정을 그녀는 알까? 여기는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아! 우려했던 소식을 들었다. 러시아가 바르샤바를 침공했다. 러시아가 고국의 독립을 짓밟는구나. 가엾은 아버지, 어머니, 굶주리고 계시겠지. 누이와 여동생은 여린 몸을 러시아 군인에게 짓밟혔을까. 나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구나. 괴로워라. 오로지 절망을 피아노에 쏟는다.’

위는 폴란드를 떠나는 청년 쇼팽의 마음이 담긴 노트를 기반으로 쓴 글이다.
쇼팽은 당시 콘서바토리(음악원) 친구인 소프라노 콘스탄치아를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쇼팽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짝사랑의 괴로움을 안고 폴란드를 떠났다고 전해진다. 짝사랑의 괴로움으로 고국을 떠나다니,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여린 남자였는지 느껴진다. 파리에 도착한 쇼팽은 진보적인 좌익 성향의 작가 조르쥬 상드와 열렬히 사랑했는데, 쇼팽의 어머니가 상드에게 전한 말이 인상적이다. “어머니와 같은 당신의 배려에 아들을 맡기겠습니다.” 이에 대한 상드의 화답 또한 이렇다. “당신의 아들을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내 삶을 바치겠습니다.” 보통의 남녀의 애정관계로 생각하기에는 갸우뚱하다. 쇼팽의 어머니가 상드에게 “우리 아들을 잘 키워주세요”라며 맡긴 것 같은 느낌이다. 허약한 신체에 폐결핵까지 앓고 있으나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쇼팽을 상드는 모성애로 사랑하고, 쇼팽 역시 그녀의 보호 아래 있고 싶어 한 게 아닐까.

쇼팽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지만 폴란드인인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 폴란드 독립을 위해 혁명군 장교로 전쟁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러한 부모님의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이 쇼팽에게도 심어졌고 그것은 그의 음악으로 펼쳐진다. 러시아가 폴란드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와 무기력함을 글과 음악으로 남겼는데, 그때 탄생한 곡이 연습곡 작품번호 10의 12 <혁명>이다.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오른손이 코드를 짚고 왼손은 16분음표로 분노의 질주를 하는 곡이다. 여기에 연약한 쇼팽은 없다. 쇼팽은 나라가 짓밟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곡을 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쇼팽도 그랬다니 반갑다. 나 역시 사회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는 음악이란 무엇인지, 그 역할이 무엇인지 더 고민하게 되었고, 음악 하는 나 자신이 나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회의 큰 바람 앞에서 음악은 잡히지 않은 무지개처럼 느껴졌다. 촛불정국 시절 광화문 광장에 멜로디언을 들고 나가고, 팽목항에 신디사이저로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영령들을 위해 연주를 한 것은 음악인으로서 사회에 의미가 있는 존재이길 바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 이전에 들끓는 연민의 심장이 먼저 튀어나가 행동하게 되는 것이 나의 일면이기도 하다. 쇼팽은 나라를 잃었으니 그 심장에 얼마나 피가 철철 흘렀을지 짐작할 수도 없다. 

쇼팽은 그의 고민을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냈을까?

▲ 쇼팽의 혁명 악보
▲ 쇼팽의 혁명 악보

 

바르샤바의 봉기에 쇼팽도 합류하고자 했으나, 친구 티투스가 만류하며 폴란드로 혼자 떠나 쇼팽은 혼자 타국에 남게 되었다. 쇼팽의 아버지도 참여했던 폴란드 독립군의 봉기는 러시아로부터 진압되었고 독립군은 투항했다. 이후 아버지의 조국 프랑스에 도착한 쇼팽은 파리에서 ‘파리 폴란드 문화협회’에서 활동한다. 외부적으로는 폴란드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나가자는 것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폴란드 독립을 쟁취하자는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었다. 문화협회에 가담한 쇼팽 자신은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혁명을 지지했고 스스로도 혁명파라고 생각했다. 그런 배경 속에서 폴란드의 리듬이나 선율을 빌어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등을 작곡했다. 
마주르카는 3박자의 폴란드 춤곡으로 마조비아(Mazovia) 지방 사람을 마주르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했다. 마주르카 리듬은 셋째 박에 액센트가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고, 빠른 곡의 경우 밀고 당기는 듯 경쾌하고 역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다. 폴로네이즈 또한 폴란드의 민속춤곡으로 박진감 넘치는 폴로네이즈 리듬을 가진 3박자와 3부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썼다. 그럼으로써 쇼팽은 폴란드의 민속춤곡을 예술 음악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이것이 쇼팽의 고국을 위한 독립운동 방식이었던 것이다.
쇼팽은 또한 애국시나 전투항쟁시를 쓴 미츠키에비치의 서사시에 영감을 받아 발라드 1번을 작곡하였다. 폴란드인으로서 느끼는 민족의식을 그대로 음악에 담아낸 것이다. 

독일의 음악저술가 빌헬름 폰 렌츠는 쇼팽의 음악에 대해 “쇼팽은 그 당시의 유일한 정치적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폴란드를 작곡했다.”라고 했다.

대학생 시절, 음악은 순수해야 한다는 말씀을 선생님께 들었다. 너희는 데모하지 말고 연습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 순수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나의 어디까지가 개인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일까. 우리는 예외 없이 사회적 동물로 살 수밖에 없는 집단 구조 속에 있다. 사회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예술가라도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적 굴곡을 수차례 겪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정치에 신물이 났으면, ‘정치적이야’라는 말을 개인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부정적으로 쓸까. 하지만 순수해야 한다는 말이 오히려 더 정치적인 왜곡처럼 들리기도 한다. 음악인들이 순수음악으로 인식하며 연습하고 연주하는 쇼팽의 작곡이 다분히 의도적이며 정치적 지향이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쇼팽은 폴란드에 돌아올 생각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나라를 잃게 된 쇼팽은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영영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쇼팽이 평생 소중하게 지녔던 한 줌의 폴란드 흙은 그의 심장과 함께 파리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고 한다. 

오늘은 쇼팽의 피아노곡을 연습하자. 
연습곡 <혁명>과 발라드 속으로 들어가, 음표 하나하나에 담긴 그의 고국에 대한 절절함에 나를 맡겨야겠다.


신은경 
스토리텔링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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