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 차이콥스키의 빛과 그림자
음악칼럼 - 차이콥스키의 빛과 그림자
  • 신은경
  • 승인 2022.07.2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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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장마와 무더위로 힘든 여름, 빗길을 오가며 광화문에 있는 연습장을 드나들었다. 
세종문화회관의 여름 방학 기획 [백조마을의 차이콥스키] 공연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차이콥스키 음악을 어린이들이 즐겁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든 음악극이었다.
백조마을 공연에 쓰인 곡들은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과 <1812년 서곡>, <피아노협주곡 1번>, <현을 위한 세레나데> 등이다. 연습을 하면서 내가 어린 시절 차이콥스키 음악에 가졌던 그 감정 속으로 다시금 빠져들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은 내 학창 시절 씨름하듯 연습했기에 마치 애증쌓인 부부 같다면, 차이콥스키 음악은 좋아하면서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짝사랑 같다.

▲ 차이콥스키 노년 사진
▲ 차이콥스키 노년 사진

내가 처음 접한 차이콥스키의 곡은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장조의 곡임에도 불구하고 우수에 차 있던 협주곡을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들으며 흥얼거렸다. 바이올린 선율에 따라 마음은 함께 오르락내리락하였으며, 리듬에 따라 몸은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바닥으로 꺼지기도 하였다. 바흐나 베토벤의 어두움과는 다른 정서를 가진 곡이었다. 낭만적인 선율에 센티멘탈함과 우울한 느낌을 주었는데, 힘찬 부분까지도 스산한 쓸쓸함이 배어있었다. 사춘기 시절, 내성적인 내게 딱 맞는 곡이었다.
교향곡 6번 <비창>은 장엄하면서도 음울한 곡인데, 울면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싶을 때 들으면 자신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킬 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음색은 무지개에 회색이나 검정색과 섞어 사포로 쓰윽쓰윽 긁은 소리 같다. 사포로 밀어낸 소리엔 고르지 않은 알갱이 같은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리고 그감정들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차이콥스키는 어떤 생애를 살았기에 이런 선율과 음색이 나올까. 오늘 그 짝사랑 안으로 들어가 본다.

1840년 우랄산맥 가까운 곳에서 태어난 그에겐 형제가 많아서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이 하나 하나에게 세세한 보살핌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프랑스인 가정교사 파니가 그에게 지리, 역사, 독어, 불어 등을 가르치며 보살펴 주어서 차이콥스키는 그녀에게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파니가 그 집안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이별 충격에서 차이콥스키는 몇 년간 헤어나오지 못했다. 파니는 차이콥스키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매우 감수성이 강했기에 특별한 접촉법이 필요했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를 입기 쉬웠습니다. 마치 유리와 같았습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아주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잔소리조차도 그는 당황했습니다. 조금 엄격한 기색을 나타내기만 하면 그는 매우 동요되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무척 내성적이고 섬세했던 아이였다. 나 또한 이별이라 할 수도 없는 일에 눈물부터 나와서 욕먹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혼나는 것인데도 옆에서 큰 상처를 받기도 했다. 위대한 음악가 또한 그러하다니 위로가 되고, 감수성이 여리고 예민한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치고 음악적 재능이 있었으나, 병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은 차이콥스키가 음악으로 돈을 벌기 어렵다고 판단한 부모는 그를 1850년에 법률학교 기숙사에 보냈다. 당시 차이콥스키는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어머니 옷자락과 마차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고 한다. 내성적인 차이콥스키가 낯선 곳을 두려워하며 얼마나 따뜻한 애정을 갈구했을지 느껴진다. 
그는 기숙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동성애적 성향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 시절엔 동성애가 죄악시되었기에,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죄책감과 좌절이 그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1854년에 어머니가 콜레라로 요절하고 차이콥스키는 어머니 죽음에 충격을 받는다. 
말수도 적은 차이콥스키가 혼자서 얼마나 끙끙거리며 혼란스러운 십대를 보냈을까. 그럼에도 그는 법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법무부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공직에 적성이 맞지 않던 그는 1862년에 당대의 거장이었던 안톤 루빈슈타인이 만든 야간 음악 수업을 듣게 되고, 법무부의 일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넋을 잃은 채 공문서를 찢어 차근차근 씹어먹다가 그것이 한 장도 남지 않게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고 하니 그의 영혼이 다른 곳에 있었음이 느껴진다. 결국 그는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음악 수업에만 몰두하였고,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교수가 되었다. 차이콥스키는 내성적이었지만 음악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당대에 자신이 머리를 숙일 작곡가가 없다고도 하였다.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비평에 크게 낙심하기도 했다.

▲ 젊은 시절의 차이콥스키
▲ 젊은 시절의 차이콥스키

차이콥스키에게 열렬히 구애하던 여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었기에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가 자신의 사랑을 거절하면 자살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냉담한 자신의 모습이 마치 당시 작곡하고 있던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의 정 없는 오네긴 캐릭터처럼 느껴져, 그녀에 대한 연민으로 결혼을 수락했다. 하지만 사랑과 육체적 관계가 없는 전제의 결혼생활은 그녀의 정신을 더욱 불안정하게 했고 차이콥스키 또한 결혼생활의 갈등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다량의 진통제를 먹고 술을 마셨던 그는 인생이 산산조각으로 파괴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후원하던 미망인 폰 메크 부인에게 결혼생활의 파탄을 서신으로 알리고 그녀의 경제적 도움으로 결혼한 지 80일 만에 러시아를 떠나 별거이자 요양 생활을 하게 되었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를 만나지 않는 조건으로 그가 작곡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1877년~1890년까지 거액의 후원을 했던 존재다. 당시 주고받은 편지에 그녀는 차이콥스키의 결혼 소식에 무척 괴로웠고 질투가 났다고 쓰여있다. 차이콥스키를 만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주로 알려진 바와 같이 플라토닉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사춘기 시절 즐겨들은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때 쓴 곡인데, 마음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이런 엄청난 대곡을 쓰다니 감탄만 나온다. 천재는 자신의 감정에 머무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승화시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이 곡은 당시 기교적으로 도저히 연주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초연을 거부당했던 곡이었다. 현재는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연주할 정도로 음악가들의 기량이 향상되었고, 동성애 또한 여러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간은 진화하는가 보다. 

▲차이콥스키의 청년 시절

 

하룻밤에 10번을 울었다고 서신으로 전하기도 했던 그는 신경과민증과 조울증이 있었다. 극도로 섬세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생각지 못하는 다양한 뉘앙스를 실어 곡을 만들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정상인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면서 이끌려 갈 수밖에 없던 그의 삶이 아프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정상인의 삶도 없을 터인데, 평생을 죄책감과 좌절로 살아간 음악 천재의 삶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슬프고도 아름다운 곡들 이면엔 쉽지 않았던 그의 삶이 있었다. 슬픔이 깃들지 않은 아름다움은 없다고 했던가. 짙었던 그 삶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찬란한 음악의 빛을 주고 갔다.
   


 

신은경

스토리텔링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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