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패션과 문화 이야기
패션칼럼-패션과 문화 이야기
  • 지재원
  • 승인 2022.10.1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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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이 미아케와 하나에 모리

 

▲ 생전의 이세이 미야케 모습(출처 : AP 연합뉴스)
▲ 생전의 이세이 미야케 모습
(출처 : AP 연합뉴스)

지난 8월5일 이세이 미야케가 84세, 8월11일 하나에 모리가 96세로 타계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일본 패션계의 커다란 두개의 별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세계의 패션산업은 프랑스 파리의 오트쿠튀르 컬렉션(고급맞춤복 신작발표회)과 프레타포르테 컬렉션(고급기성복 신작발표회)을 기반으로 발전해 왔는데, 하나에 모리는 아시아인 최초의 파리 오트쿠튀르 의상조합 멤버였고, 이세이 미야케는 처음으로 파리에 진출한 일본 디자이너로 1980년대에 요지 야마모토, 가와쿠보 레이 등과 함께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서 ‘일본 선풍’을 불러 일으킨 주역이었다.    
이세이 미야케가 처음부터 고급 기성복 분야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활약해온 데 비해, 하나에 모리는 고급 맞춤복 분야로 진출한 뒤 나중에 고급 기성복 분야까지 영역을 넓힌 디자이너였다. 

▲ 주름옷 ‘플리츠 플리즈’를 비롯한 다양한 스타일의 이세이 미야케 작품들(출처 : 이세이 미야케 홈페이지)
▲ 주름옷 ‘플리츠 플리즈’를 비롯한 다양한 스타일의 이세이 미야케 작품들
(출처 : 이세이 미야케 홈페이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세이 미야케는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라는 주름옷으로 유명하다. 플리츠 플리즈는 1993년에 첫선을 보인 이후 오랫동안 전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그야말로 스테디 셀러 아이템이다. 
 ‘주름옷’이지만 주름진 원단을 재단해서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평면 원단을 주름잡는 기계에 일일이 손으로 접어 넣어서 제작하기 때문에 작업공정이 그만큼 까다롭고 원단도 일반 옷들보다 3배 정도 더 많이 소모된다. 이처럼 제작과정이 까다롭다 보니 오랫동안 인기 아이템임에도 불구하고 복제품이 거의 없어, 한눈에 이세이 미야케 제품임을 알아 보게 해준다. 

이세이 미야케는 일본 디자이너 최초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는 그가 일본 패션계에서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해 길을 터주는 데에 가장 앞장선 디자이너였던 점에도 주목했었다. 
미야케 본인은 일찍이 파리에 진출하여(1973년) 80년대초부터 파리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파리 컬렉션은 여전히 장벽이 높았다. 이탈리아나 영국에서 톱디자이너로 인정받고 있는 디자이너들에게도 파리무대 참가조건은 몹시 까다로웠고, 그 장벽을 넘어 참가해도 신인 취급을 받았다. 

▲ 플리츠 플리즈는 유명 연예인들에게도 인기 아이템(출처 : 가수 강민경 SNS)
▲ 플리츠 플리즈는 유명 연예인들에게도 인기 아이템
(출처 : 가수 강민경 SNS)

이에 이세이 미야케는 도쿄패션디자이너협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파리컬렉션과 마찬가지로 1년에 2회 신작을 발표하는 도쿄 컬렉션을 신설해 이를 주도했다. 파리 컬렉션 진출을 꿈꾸는 일본 디자이너들은 도쿄 컬렉션에서 먼저 경험을 쌓을 수 있어서 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간사이 야마모토, 고시노 히로코와 준코 자매 등 여러 디자이너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그후에도 준야 와타나베, 치토세 아베, 케이 니노미야 등이 뒤를 이어 파리를 비롯한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가와쿠보 레이가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의 브랜드 혹은 서브 브랜드의 디자인을 맡기는 방법으로 후진양성을 하는 스타일이라면, 이세이 미야케는 후학들에게 그의 ‘존재’ 자체가 롤모델이었다. 그만큼 영향력이 큰, 추앙받는 디자이너였다.  
그가 후진들의 롤모델로서 디자인 창작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타무라 미도리(73세) 미야케디자인스튜디오 대표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세이 미야케가 처음 파리 진출할 때부터 조력자 역할을 해왔으니 반세기에 걸친 동반자다. 기타무라 대표는 영업과 디자인실을 총괄할 뿐 아니라 <플리츠 플리즈 &#8211; 미야케>라는 저서를 시리즈로 펴내면서 이세이 미야케의 패션철학을 널리 알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세이 미야케는 옷을 만드는 일은 ‘팀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옷이 세상에 나오려면 패션 디자인만이 아니라 소재(원단)에서부터 재단과 봉제, 영업과 홍보 등 관련 분야 어떤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이너가 스타처럼 부각되는 데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유명세에 비해 그가 직접 언론에 등장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이유이기도 했다.  

▲ 파리 컬렉션에서 활약하던 시절의 하나에 모리(출처 : AP 뉴시스)
▲ 파리 컬렉션에서 활약하던 시절의 하나에 모리
(출처 : AP 뉴시스)

하나에 모리는 출발부터 좀 남달랐다. 도쿄의 긴자에 패션숍을 연 뒤 약 20년동안은 영화배우와 가수 등 연예인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았던 디자이너였다. 그에 싫증을 느꼈는지 디자이너 생활을 접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그렇다면 프랑스 파리는 한번 가보고 나서 결정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남편이 섬유회사 대표여서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던 하나에 모리는 패션을 공부한다기보다 유람하는 마음으로 파리로 가서 6개월 정도 지내본 뒤, 패션 디자이너로서 의욕을 새롭게 다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 런던에서 다시 6개월 정도 패션계와 문화계 등을 돌아보고 나서 패션계 비시즌에 미국 뉴욕에서 개인 패션쇼를 열었다. 주제는 ‘나비 부인(Madame Butterfly)’. 
 ‘나비부인’은 19세기말, 일본에 주둔하던 미국 해군장교와 15세의 어린 게이샤 ‘초초’상(나비라는 뜻의 예명)의 러브 스토리를 그린 소설을 푸치니가 오페라로 각색해 유명해졌다. 서양 남성들에게 동양 여성의 순애보가 로망처럼 여겨진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후 ‘나비부인’ 하면 일본여성을 떠올리게 했다. 하나에 모리는 그것을 자신의 심볼로 차용했다. 

▲ 하나에 모리 작품 전시회 장면(출처 : 연합뉴스)
▲ 하나에 모리 작품 전시회 장면(출처 : 연합뉴스)

뉴욕 패션쇼에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와 패션기자, 패션 행정가들이 대거 초청됐고 미국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며 성공을 거두자 파리오트쿠튀르의상조합은 1977년 하나에 모리를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적용하지 않고) 정회원으로 특별영입했다.
 패션현장을 취재하러 다니던 시절, 도쿄 하라주쿠 본사에서 하나에 모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솔직하고 직설적인 답변태도가 인상적이었는데, 그중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창간한 패션잡지 <유행통신>에 관한 얘기였다.
Q 패션 디자이너가 직접 잡지를 창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데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는지?
A 내가 아시아 최초로 오트쿠튀르의상조합 멤버가 되었는데도 일본의 언론에서는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서 잡지를 창간했다.
Q 근데, 요즘의 <유행통신>에서는 하나에 모리 작품은 볼 수 없고 요지 야마모토나 가와쿠보 레이만 나오던데…. 
A 기자들한테는 편집권이 있다고 했다. 무엇을 취재할 건지는 기자들이 정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내가 발행인인데도 통하지 않았다(웃음).

▲ 3년만에 다시 열린 함평나비축제(출처 : 함평나비축제 홈페이지). 하나에 모리는 2008년 열린 함평세계나비·곤충엑스포에서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되어 방한하기도 했다.
▲ 3년만에 다시 열린 함평나비축제(출처 : 함평나비축제 홈페이지).
하나에 모리는 2008년 열린 함평세계나비·곤충엑스포에서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되어 방한하기도 했다.

필자가 인터뷰한 90년대 초반엔 이미 하나에 모리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을 때여서 일본의 패션지에 등장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인터뷰한 지가 꽤 오래되었으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꽤 많다. 저런 말을 해도 될까 싶은 내용도 서슴없이 꺼내놓는가 하면 본인이 수용할 수 없는 건 또 분명하게 밝혔다. 이를테면 필자의 귀국 일정 때문에 오전에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걸 수락하는 대신 사진은 못찍겠다고 했다.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2008년 함평 세계나비·곤충엑스포가 열렸을 때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되었을 정도로 ‘나비’는 하나에 모리를 한평생 대표한 상징이었다.  
오늘의 일본패션을 있게 한,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거장이 2022년 8월에 세상을 떠난 것은 비단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인 손실이기도 하다. 그들의 유지가 잘 전승돼서 ‘이세이 미야케’와 ‘하나에 모리’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처럼 두고두고 기억되기를 기대해 본다.    


글 / 지재원(패션포스트 논설주간, 고려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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