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 작은 개울에서 우주를 그리다
음악칼럼 - 작은 개울에서 우주를 그리다
  • 신은경
  • 승인 2023.01.0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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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바스찬 바흐

바로크(BAROQUE)시대가 저물어가는 17세기 후반, 음악명문가에서 바흐는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흐(BACH)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작은 개울, 시내’라는 뜻이다. 그의 집안은 7대가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했고 아버지인 요한 암브로스와 형들 또한 음악가로서 활동을 하였다. 집안 분위기에 따라 바흐도 자연스레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바흐 9살에 어머니가, 이듬해 10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어린 바흐는 큰 형인 크리스토프의 집에 얹혀살았고 형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웠다. 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캐논이란 곡으로 유명한 파헬벨의 제자였고 형의 집엔 북스테후데나 프로베르거 등 대가의 악보들이 있었다. 바흐는 그 악보들을 보고 싶어 했지만, 뛰어난 동생에게 위기감을 느낀 형은 악보를 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바흐는 형이 잠든 사이 몰래 달빛에 필사하며 공부하고 익혀서 반년 후, 그 악보를 다 사보했다. 그리고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의 연주를 듣기 위해 50킬로미터를 걸어 갔다 오기도 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몰입, 끈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15살에는 형 집을 나와 가난한 학생을 위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성 미하엘 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 독일 내에서 유명한 큰 규모의 음악도서관이 있었는데, 거기에 저명한 작곡가 175명이 작곡한 악보 1102권이 소장되어 있었고 이것은 당연히 바흐에게 영향을 주었다. 17세에 그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야 했으나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곧장 일자리로 뛰어든다. 그것은 시종을 겸한 현악기 주자였다. 이후 목소리도 좋았던 바흐는 성가대 합창도 가르치고 작곡도 하고 오르간 연주도 하면서 실력을 쌓아가고 명성을 쌓아간다. 하지만, 명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흐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작품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음악 활동은 음악에 대한 헌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성실한 노동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그가 작품 이외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반면,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던 두 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는 일기를 꼼꼼히 써서 우리가 그나마 바흐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다. 바흐의 첫 번째 부인이 갑자기 세상을 뜨고 상심해 있던 차, 19살의 소프라노 안나가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35살의 바흐와 결혼했다. 안나는 악보 사보도 바흐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잘했고 음악적 소양도 있던 아내였다. 바흐는 두 부인과 스무 명의 아이를 가졌으나 그 중 열 명의 아이가 살아남았다. 당시는 아이들이 병으로 잘 죽었기에 많이 낳는 관례가 있었다고 한다. 집에는 늘 돌봐야 하는 아이들, 찾아오는 제자들과 음악가 손님들이 많았다. 안나는 13년 동안 매년 임신 상태에다 경제적으로는 쪼들림에도 불구하고, 바흐와 함께 한 일상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30년 가까운 결혼생활 내내 그이는 제 남편이자 연인이었답니다. 왜 저는 그토록 그이를 사랑하고 그이의 표정이나 말 한 마디까지 이렇게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그이의 어떤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죽는 마지막 순간에 떠올릴 일들은 그이가 나를 팔에 가두고 푸가를 연주하던 그 저녁 무렵이나, 저를 안아 올리고 라이프치히의 새 집 문지방을 건너던 그런 순간들일 거예요. 내 곁에서 잠을 자고 음식을 먹고 일하는 사람이 그런 훌륭한 곡을 작곡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 음악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틀림없어요. 그는 자신의 재능을 뽐내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훌륭한 재능을 가졌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어요. 음악만이 진실한 생명이었고 음악가는 다만 하나의 악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바흐의 천재성을 알아본 안나가 그의 음악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에게 얼마나 순수하게 조력했는지 느껴진다. 그는 그녀를 위해 두 권의 클라비어 소곡집을 선물했다. 그렇게 그를 열심히 내조하고 사랑했던 안나는 바흐의 죽음 이후, 바흐의 첫 번째 부인 자식들과 상속 분쟁에서 지고 자신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정부의 보조금을 받다가 가난하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아, 마음이 아프다.

바흐는 “나처럼 일을 한다면 누구든 나처럼 작곡할 수 있다”고 했다. 라이프치히에 머물 때, 바흐는 일주일 동안 칸타타 하나씩 쓰고 연습시키고 교회 미사에 올려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해냈다. 음악 노동자 같은 성실함의 배경엔 10명의 아이와 아내를 둔 가장이란 무게가 있었을 것이다.
결혼 후에 바이마르 궁에 가기 위해 뮐하운젠 시의회에 낸 사직서 중 이런 글이 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현재 저의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집세는 한 번밖에 내지 못했고 생필품도 가장 기본적인 것만 구입하고 있으니 현재로서는 그저 생계가 막막하기만 합니다.”
현실 속 고군분투는 늘 짠하다. 다행히 이 음악천재가 늘 궁핍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공작이나 왕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후하게 하사하기도 했고, 바흐는 음악가로서 최고 직급인 궁정악장에 이르기도 했다.

음악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바흐는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자를 받아 음악천재의 DNA를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6성 푸가를 즉흥으로 칠 정도였으니. 그런 그가 어린 시절 고아가 되고서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뛰어남에도 가난으로 대학을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바흐는 자신의 환경 속에 안주하지 않았다. 대가들의 연주를 통해 배우고 비발디, 텔레만 등 거장의 음악을 필사하고 개작하면서 겸손하고 성실하게 공부를 했다. 자신의 완성작을 계속 수정하면서 개선했다. 당시 음악 선진국인 이탈리아에서 오페라가 유행이었고 큰 인기를 얻었다. 바흐는 아이들 교육비와 생활비로 허덕이며 조건이 좋은 직장을 찾아다니긴 했지만, 유행하는 음악을 쫓지는 않았다. 그에겐 음악에 대한 완고한 신념과 고집이 있었다. 

바흐는 다른 유명 작곡가들처럼 해외에 나가지도 않고 자신이 살던 독일의 여러 지방에서 음악 활동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졸업에 유학파가 아닌 음악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그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며 추앙하고 있지 않은가. 그를 경력이 아닌 작품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바운더리 몇 백 미터 안에서만 살고 활동하던 그는 어떻게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키고 우주의 소리를 창조했을까? 

도덕경 48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
창문을 통하지 않고도 세상을 본다.
나간 것이 점점 멀어질수록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든다.
이런 이치로 성인은 행하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명철해지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안나 막달레나 바흐

바흐는 어지러운 환경 속에서 음악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찾았을 것이다. 우주의 소리는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었다. 음악에 겸손했던 그는 온 생애를 음악에 헌신함으로, 300년이 흐르는 동안 낡지 않는 음악의 통로가 되고 우주의 일부가 되었다. 

바흐의 클라비어 협주곡으로 힘차게 시작하고 프랑스 조곡으로 정돈하는 하루를 가져보면 어떨까. 
어느 하루, 우주의 소리를 듣는 혜택을 누려보길 바란다.

 

 


신은경
스토리텔링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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