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 - 온갖 구박에도 꿋꿋이 지켜온, 반주(飯酒)
생활수필 - 온갖 구박에도 꿋꿋이 지켜온, 반주(飯酒)
  • 이재규
  • 승인 2023.02.0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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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옷 고르는 시간, 먹을 음식 고르는 시간은 내가 가장 아까워하는 시간이다. 외양보다 품성이 먼저라거나 또는 함께 먹는 사람이 중요하다거나 어차피 소화될 음식인데 등의 이유가 아니다. 그냥 옷이나 음식 고르는 그 짧은 고민의 시간이 귀찮고 아깝다. 덕분에 옷장은 비슷한 톤의 같은 브랜드로 채워진다. 계절에 따라 두께와 입는 옷의 수만 달라진다. 몇 년의 차이가 있는 사진 속의 옷이 똑같은 경우가 허다하다. 나에겐 옷 고르는 시간, 음식점 찾는 시간에 메일 하나 더 확인하고 아이디어 뽑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맞다. 참으로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다.

입을 옷 고르기보다 더 귀찮아하는 건 음식 고르기다. ‘뭐 먹을까?’ 질문에 즉답이 나오지 않으면 식욕이 소멸된다. 식사를 고르지 못했을 때는 반경 50미터쯤 내 아무 식당이나 들어간다. 상대방은 황당하겠지만 오래된 습관이고, 세월이 흘러도 음식 고르는 시간은 여전히 아깝다. 덕분에 식사 약속에서 내가 음식이나 식당을 고른 적이 거의 없다. 참으로 편한 삶을 살고 있다.

식사의 종류에는 관대(?)하지만 빠져서는 절대 안될 한 가지가 있다. 술이다. 어느 자리든 밥을 먹을 때의 반주(飯酒)는 식사의 종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반주 없는 식사는 밋밋하기 그지없고 차갑게 식은 짝사랑 같다. ‘끼니’와 함께 하는 한 잔의 술은 관계의 농도와 판단의 방향과 결정의 속도의 효율성을 높여 준다.

반주를 즐긴다고 하면, 잘 모르는 이들은 내가 술을 엄청 잘 마시거나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내 주량은 맥주 한 병이다. 소주는 아예 마시지도 못한다. 소맥은 두세 잔 마시면 졸기 시작한다. 나는 술을 즐기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잘 마시는 사람은 되기 어렵다. 맥주 한 병 이상 마시면 과음했다고 말하는 나의 반주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한반도에서 반주는 통일신라부터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전통적인 술 문화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매 끼니때마다 술을 곁들여 마셨고, 집안마다 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술 빚는 법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꽤 오래된 반주의 역사다.

수천년간 이어진 반주의 역사에 걸맞게 반주용 술의 종류도 다양했다. 반주용 술의 재료와 빚는 방법이 집집마다 달라 ‘가양주(家釀酒)’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가양주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다양한 전통주가 되었다. 하지만 반주 문화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맥이 끊겼거나, 한국전쟁 이후 식량위기에 따른 양곡관리법에 의해 제조가 금지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반주 문화도 자연스레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한강의 기적’으로 궁핍한 삶을 조금씩 벗어나면서 반주 문화도 다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먹고 살만 하니 되살아난 반주다.

처음 유럽 출장을 갔을 때 매일 매끼의 식사가 그리 즐거울 수가 없었다. 낯선 음식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반주 덕분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식사 전과 식사 중에는 와인을 마실 수 있었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꼬냑이 있었다. 프랑스의 식사는 요리가 아니라 반주가 ‘메인’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주문화가 발달해 있다. 영국이나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등 프랑스 이외 유럽 국가에서는 대부분 반주로 맥주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네 가양주처럼 지역마다 무궁무진하게 다른 맥주의 맛을 즐기는 식사들은 내게 천국을 만들어 주었다. 유럽 출장을 통해 나의 반주 습관이 무례함이 아닌 글로벌 스탠다드에 걸맞은 품격 있는 문화였음을 자부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술이 남아 있을 때 조금씩 더 부어주는 ‘첨잔문화’를 몰라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정갈한 음식과 곁들인 사케 반주는 언제라도 반가웠다. 중국에서는 반주가 아니라 그냥 술판으로 끝날 때가 많았다. 게다가 바이주는 나에게 너무 독한 술이어서 점심에 반주 마시다 호텔에 업혀간 적도 있었다.

반주 습관에 대해 주치의에게 조언을 구한 적도 있었다. 의학적으로 반주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듯했다. 약간의 반주를 식사 전후에 마시면 위장 기능이 활발해져 소화를 돕고 장운동을 촉진시켜 배변도 원활하게 만들고 가스도 잘 배출시킨다고 한다. 변비로 고생한다면 반주를 마셔야 한다. 또한 반주는 엔돌핀 분비를 촉진시켜 소화 기능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소화력이 약하다면 반주를 마셔야 한다. 알콜이 혈액으로 흡수되면 혈관을 확장시켜 혈액의 순환이 좋아지고 심장이나 뇌혈관에서 피의 흐름이 대폭 개선 된다고 한다. 도무지 의학적으로 반주 습관을 고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도 반주는 옳다. 그럼에도 요즘 나의 반주 습관은 가족에 의해 핍박 받는 중이다. 이게 다 대학생이 된 딸아이 때문이다. 내가 남긴 맥주를 딸아이가 가끔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반주를 대하는 짝꿍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사실 소주파인 딸아이는 오직 맥주인 나의 반주를 마뜩잖게 여긴다. 아빠 혼자 마시는 반주가 안쓰러워 함께 마셔주는 척을 하는 것일 텐데, 짝꿍은 딸아이의 따뜻한 가족애와 이타심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중이다.

위기에 닥친 반주 습관이지만, 맥주 한 병도 온전히 끝내기 어려운 반주를 멈출 생각은 없다. 나의 배변을 위해, 소화를 위해, 혈관을 위해서 뿐만 아니다.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식사 자리의 반주를 결정하는 것은 좌장 또는 가장의 권위를 유지하는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라는 '꼰대이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식사 자리의 반주를 결정하는 것은

좌장 또는 가장의 권위를 유지하는 마지노선


글 : 이재규 (주식회사 엔케이인베픽/C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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