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 어떤 음악가의 물음
음악칼럼 - 어떤 음악가의 물음
  • 신은경
  • 승인 2023.02.0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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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평생 따라다니는 물음이 있다. ‘음악가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물음이다. 이것은 ‘음악가로 어떻게 먹고 사나’라는 현실적인 물음이기도 하고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라는 물음과도 닿아 있다. 

초등학교 6학년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연습하던 피아노 음악이 마냥 좋아서였다. 초등 고학년이 될수록 베토벤과 쇼팽 음악의 선율은 물론, 화성의 색채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전공자의 길을 걷겠다는 단순한 결심과 달리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한 기쁨은 잠시, 스스로 비교와 열등감에 휩싸여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겠다는 좌절은 생각보다 쉽게 왔다. ‘세계적인’이라는 말을 빼더라도 당장 옆 친구보다 잘할 자신이 없었다. 하면 할수록 피아노 음악이 점점 어려웠기에, 동양인인 내가 서양음악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애초에 잘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복 입은 외국인이 가야금 병창이나 판소리하는 것처럼 흉내 내기에 그쳐 우스꽝스럽진 않을까? 난 한국인인데 피아노가 아니라 국악기를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저 피아노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생각을 뒤집어 보았다. 

전공에 자신 없던 고등학교 2학년, 지루한 국악개론 수업이 끝나자마자 쉬는 시간에 선생님을 뒤따라 복도로 나갔다. “선생님, 저 대학 가면 대금으로 전공을 바꾸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대금을 할 수 있어요?” 예고의 어두운 복도는 내 마음만큼이나 어두웠다.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국악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았다. 쉬는 시간이 희망의 시간이길 바라며, 자못 진지한 물음을 던진 나는 선생님의 답변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대금을 하려면 폐활량을 키워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 내 기억엔 폐활량이란 단어만 남아 있다. 국악을 접할 수 있는 로드맵을 알려주시리라 기대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더 미궁에 빠졌다. 폐활량을 위해 당장 무언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호기심 어린 학생과 국악 선생님의 대화는 수업 종소리에 맥없이 끝났다.

예고 시절 내내, 피아노에 대한 의욕은 떨어지고 전공 선생님과 음악적 연결 없이 겉도는 레슨이 지속되었다. 낮춰 지원한 대학입시에도 떨어졌다. 과정은 지루하고 결과는 쓰라렸다. 더욱 우울했지만, 음악대학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피아노 연습을 했다. 방 안에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크게 틀어놓고 한바탕 울고 나면, 연습할 힘이 생겼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두려운 피아노를 쳐다보았다. 연습할 때마다 첫 소리를 내는 것이 두려워 건반 누르기를 한참 망설였다. 하지만 발등에 불똥 떨어진 나는 두려움과 상관없이 연습하고 연습해야 했다. 연습할수록 다행히 실력이 늘고 자신감이 붙었다. 무서운 피아노 건반에 나의 여린 심장을 조심스럽게 얹기 시작했다. 건반 하나하나에 대한 몰입은 나에 대한 몰입이었다. 재수하면서 피아노 음악이 좋아지니 대금전공으로 전과하는 것은 먼 이야기가 되었고 피아노는 다시 나의 친구가 되었다. 

대학 진학을 하고서 음악가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전공자로서 입지가 흔들거렸고, 대학 내 동아리에서 사회과학서적을 읽으면서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현재에 이른 여기의 나를 어떻게 세울지 고민되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청산되지 않은 것은 정치뿐 아니라 교육과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이 배우는 음악 교과서엔 친일 음악가의 곡이 그대로 실려 있었고, 굿 음악처럼 정교한 장단의 뛰어난 음악은 미신으로 치부되어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훌륭한 우리 음악을 어떻게 살리고 어떻게 알리지?’ 말살된 우리 고유의 문화를 복원하는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 전국 가정에 퍼져있는 피아노로 사람들이 우리 전통음악과 더 멀어진 건 아닌지, 피아노 전공자인 내가 그것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음악하는 나의 삶에 힘을 주고 싶었다. ‘내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들겨 우리 장단을 표현하자!’ 헝가리의 바르톡이나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등이 작곡한 민족주의적인 음악들처럼 우리나라에도 국악을 건반화한 작품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희한하게도 대학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선배들을 만났고, 그 만남은 졸업 후 1)민족음악연구회라는 단체로 이어졌다. 민족음악연구회 활동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온 고민과 더불어 내가 하고자 하는 음악에 대한 답이었다. 그곳에서 우리 전통음악인 국악도 많이 접하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민족음악에 관한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졌다. 민족음악에선 피아노가 장구처럼 타악기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민족음악연구회 작곡가들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할 때 국악 장단에 맞춰 몸이 덩실덩실 흔들렸다. 클래식 작품을 연주하는 것과 또 다른 희열의 세계가 있었다. 외국어처럼 들리던 국악이 얼마나 깊은 음악이고, 보물 같은 유산인지 깨달으며 자랑스럽기도 하고 감사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20대의 나는 음악가로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모아가고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동시에 클래식 작품을 서울음악학회라는 모임에서 함께 공부하고 연주했다. 피아노에 대한 열망과 클래식 작품에 대한 사랑 또한 깊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낳고 육아를 하면서 연구회 활동은 뜸해지고 30대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른 두 장르의 음악을 접하고 있는 나는 음악가로서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민족음악은 만들어지고 있는 단계였고 사회 문제 인식에서 시작된 것이었기에, 내겐 민족음악에 대한 사랑보다는 당위성이 컸다. 나의 당위성은 내가 가진 음악의 열등감에서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위성으로 옳고 싶던 20대는 참으로 옳았다. 열등감의 뿌리만큼이나 더 많이 옳았으면 했다.

힘껏 괴로웠던 10대, 20대를 거쳐 ‘음악가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현재 ‘음악가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물음으로 바뀌고 있다. 치유하고 정돈하는 시기에 와있어서 내게 그런 물음이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대에서 당당하고 관객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음악가, 음악과 연결되고 관객과 연결되는 음악가, 비교보다 내면에 충실한 음악가, 음악으로 치유의 빛을 전하는 음악가 등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다. 미래의 나는 나무 향이 나는 공연장에서 그렇게 관객을 마주하고 서 있다. 

삶의 시기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갈지 내 안에서 물음을 던져주었다. 어느 시기에 어떤 물음이 오든 답을 하려고 애썼다. 돌이켜보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든 아니든 결과와 상관없이, 찾으러 가는 과정이 삶이었다. 

나는 오늘도 물음을 품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1) 1989년 창립했다. 주로 음악대학 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적인, 혹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음악 활동을 했다.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창작하고 꾸준히 발표했다.


신은경
스토리텔링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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