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일이다. 친구와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메뉴를 고르는데 점원의 태도가 매우 퉁명스러웠다. 화를 내지도, 참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나와 달리 친구는 차분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많이 힘드셨나 봐요.”
그 순간 점원의 표정과 그를 둘러싼 기류가 마치 봄바람에 스친 듯 미세한 변화를 일으켰다. 한참 전 일이라 정황만 기억나는데, 그때부터 그 친구는 내게 존경의 대상이 됐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우아하게 말할 수 있지?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을 보면 호감이 상승한다. 말씨로 인해 외모도 돋보인다. 하지만 말을 예쁘게, 잘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SNS에서 본 글인데, 미국의 어느 유치원 교사는 아이들에게 남의 외모에 대해 지적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그럼에도 지적해야 한다면 5분 이내로 고칠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단다.
남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어도 오지랖 때문에 타인의 외모에 곧잘 코멘트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이 유치원 교사의 말을 종종 곱씹는다. 말 잘하는 사람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말 잘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대선이 한참이다. 이목을 집중시켰던 트럼프 VS 해리스의 첫 대선 토론은 해리스가 판전승을 거뒀다. 원래 해리스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트럼프 측이 TV토론을 최대한 미뤄 투표일에 가깝게 날짜를 잡으려 한다는 예측이 돌았다. 물론 선거는, 특히 미 대선은 토론 승패가 선거 결과와 무관하다는 건 잘 알 것이다.
이번 토론에 ‘마이크 음소거’ 규칙이 적용됐다. 발언 순서가 아니면 마이크가 꺼져 상대 발언 도중 끼어들 수 없다. 애초 해리스는 음소거 규칙을 반대했으나 실전에선 음소거 시간을 공격 기회로 삼았다. 트럼프가 헛소리를 할 때마다 고개를 가로젓거나 코웃음 치고 한심하다는 표정 등으로 응수한 것이다. 미 언론이 ‘덫을 놓았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해리스의 표정 공격이 먹혔는지 트럼프의 발작 버튼이 눌렸다.
비교적 냉정을 유지하던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 이슈가 나오자 흥분하며 황당한 말을 쏟아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토론을 진행하던 앵커가 그 자리에서 팩트 체크를 함으로써 트럼프의 발언이 가짜 뉴스임을 미국 유권자를 포함한 전 세계에 알렸다.
해리스의 ‘비언어’ 공격이 먹힌 건 이뿐이 아니다. 트럼프-해리스로 나뉜 TV 분할화면에서도 해리스가 트럼프보다 유리한 그림을 연출했다. 해리스에게 말려들지 않으려 정면만 보던 트럼프에 비해 트럼프를 쳐다보며 갖가지 표정으로 리액션을 한 해리스가 여유로워 보였다. 트럼프는 말 못지않게 중요한 ‘몸짓언어’에서도 미숙했다. 말의 내용만큼 비언어적 요소가 중요함을 트럼프-해리스 토론이 보여준 것이다.
토론이나 발표를 잘하려면 준비만 한 것이 없다. 토론에 약하다는 해리스는 능구렁이 트럼프를 상대하기 위해 며칠간 호텔을 빌려 롤플레잉 한 것으로 알려졌다. 토론 세트장을 구현하고 트럼프 대역까지 세워 토론 규칙을 적용한 모의 토론이 유효했던 모양이다.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그런데 말 잘하고 싶다는 말은 막연하다. 고객을 잘 설득하는 동료 디자이너가 부럽고 여자들을 잘 웃기는 친구의 유머 감각이 질투 나며 전달력이 탁월한 강사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이렇게 말의 종류가 많으니 유튜브 채널 미키피디아(‘말 잘하는 사람들의 비결은 뭘까 with 조승연’ 편)에서 조승연 작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말 잘하고 싶다면 일단 잘하고 싶은 말의 종류부터 정하고 그에 맞춰 연습하라.’
그런데 말을 잘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걸까? 기본적으로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의 말은 재미없다. 추가 정보나 독창적인 인사이트 없는 흔한 뉴스 이야기는 지루할 뿐이다. 반대로 특별한 경험담이나 지식을 내용으로 하는 말은 흥미를 끈다. 내 생각을 혼자 정리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다져진 인사이트 또한 화자의 말에 힘을 더한다는 것이 조 작가의 설명이다.
스몰톡 잘하기
처음 만난 사람끼리 간단한 주제로 서로를 알아가는 수단의 말하기로 스몰톡(Small talk)이 있다. 센스 있고 유머러스한 아이스브레이킹은 첫인상을 좋게 만들뿐더러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기 쉽다.
스몰톡은 미용인들에게 필수인 대화법이다. 처음 만났거나 오랜만에 본 고객과의 어색함을 없애고 친밀감을 더해 일의 능률을 올린다. 역시 유튜브 채널 미키피디아 ‘현대인 필수 스킬! 스몰톡을 잘하는 4가지 비법 대방출’ 편에서 조승연 작가는 스몰톡의 원리를 테니스에 비유했다. ‘상대가 잘 받을 수 있게 공을 떨어뜨려 주는 것과 같다.’
스몰톡의 질문이 상대가 편히 반응할 수 있는 종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질문이 떠오르더라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우선이다. 스몰톡의 목적이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있어서다. 말수가 적거나 나를 조심스러워하는 사람과의 스몰톡이라면 상대가 흥미를 가질법한 주제를 선정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대화를 이끌되 상대의 답변을 유도할 수 있는 질문하기는 특히 실습생이나 막 입사한 스태프와 스몰톡 할 때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상대가 대화를 이끌면 편하기는 하다. 단, 흥미를 표현하는 추임새를 넣거나 되묻는 노력이 따라야 대화가 잘 풀린다. 최악의 응대는 단답형 대답이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을 땐 ‘연락처 교환하기’가 만능키라고 한다. 나의 다음 행동을 상대에게 알려주며 대화를 종료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가봐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식으로 정리해 보라고 조 작가는 조언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정 안될 땐 "화장실 가야 해서...."가 확실한 대화 엔딩이 될 수 있단다.
스몰톡 소재는 날씨, 주변 환경, 취미, 여행, 스포츠, 비즈니스 동향 등이 적당하고 종교와 정치 얘기는 가급적 피한다. 스몰톡의 양념은 자기소개인데 이때 상대가 나를 잘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교나 영업적인 면에서도 효과적이다. 고객을 하나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헤어디자이너라면 스몰톡에서 자기소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충분히 고민해 볼 문제다.
헤어디자이너들을 만나보면 이야기 소재가 풍부하다. 다양한 직업군의 고객을 접해서일 것이다. 조승연 작가는 좋은 대화 상대로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을 꼽았다. 나 자신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고 그것이 경쟁력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헤어디자이너는 좋은 직업이다. 물론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찾아오는 고객, 직장 상사나 동료, 후배 등이 나의 경쟁력을 키워준다고 생각하면 한 번 더 참아지고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
한편, 필자의 지인 중엔 헤어디자이너가 말을 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골이 된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마음에 들어서겠지만 말이다. 디자이너가 과묵할 수도 있지만 이 글을 쓰다 보니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대처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의문도 든다. 답은 독자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다.
성재희(전 그라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