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서 만나는 삶과 죽음
음악에서 만나는 삶과 죽음
  • 신은경
  • 승인 2024.09.3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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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가 바이올린 파트를 응시하고 천천히 지휘봉을 들어올린다. 지휘봉 끝에서 한 음이 새어나온다. 이어서 다른 현들이 화음을 하나씩 채운다. 음들은 아주 가까이 지글거리며 부딪쳤다가 이내 떨어지고 풀어지며 언덕을 넘어간다. 하나의 호흡으로 어깨동무한 음들이 거대한 산맥을 이루며 오케스트라는 마지막으로 포효를 하고 사그라든다. 음악은 끝났지만, 내 마음에 깊이 새겨진 음의 흔적은 몸으로 점점 퍼진다. 

엘가의 ‘님로드’는 첫 음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지휘자의 눈빛과 몸짓에서 긴 호흡의 여정이 시작된다. 모든 음이 끝나고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마치 그 호흡이 남아있는 듯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음의 내밀한 대화는 흐트러지지 않고 은근하게 지속된다. 피아니스트였던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다. 장대하고 긴 호흡의 감동이란! 여러 지휘자 버전이 있는데, 그중 바렌보임의 음악은 하나의 작은 씨앗이 거대한 나무를 이루듯 삶의 굵직한 줄기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은 것 같다. 

이 곡은 영국의 대표적인 작곡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제9번 변주곡에 해당한다. 잘 알려진 엘가의 곡으로 [사랑의 인사], [위풍당당 행진곡]이 있다. [수수께끼 변주곡]은 각 곡의 변주마다 엘가의 주변 지인들(그의 아내,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친구 등)의 특징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그들의 이니셜을 넣어  헌정했다. 변주곡마다 그들에 대한 힌트가 수수께끼처럼 들어가 있는데, 엘가는 그 수수께끼를 생전에 밝히지 않아 곡 제목처럼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엘가는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했는데, 오랜 기간 무명 작곡가로 있었다. 그런 엘가는 자신의 피아노 제자였던 아내의 음악적 조언도 주의 깊게 들었다. 엘가가 연주한 피아노 선율이 마음에 들은 아내는 다시 연주해 달라 요청했고, 그 선율이 발전하여 수수께끼 변주곡이 탄생했다.  

[수수께끼 변주곡] 중 9번 변주곡은 그의 절친, 아우구스트 예거에 관한 곡이다. “예거”라는 이름이 독일어로 사냥꾼이라는 뜻이라는데 착안해,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냥꾼 니므롯의 이름을 따서 곡 제목을 ‘님로드’라고 위트 있게 붙였다. 
예거는 음악당담 편집자로 엘가에게 진심어린 조언과 충고, 격려 등을 했고 엘가는 그의 말을 깊게 듣고 존중했다.  
예거는 슬럼프에 빠져있는 엘가에게 어느 날, “베토벤은 귀도 멀었는데 대작을 작곡하지 않았나. 자네가 해야 하는 일도 바로 그거야. 자네도 할 수 있어”라며,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의 제2악장을 들려주면서 격려했다. ‘님로드’ 음악 주제의 음정(음과 음 사이의 거리)이 비창 소나타의 제2악장 주제와 흐름이 비슷하다. 그것이 이 곡의 수수께끼일까? 엘가는 후에 이 곡이 비창의 2악장이 암시되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예거는 수수께끼 변주곡 악보를 당시 대지휘자인 한스 리히터에게 보여주었고, 리히터가 첫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면서 엘가의 이름이 영국을 넘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무명 작곡가인 엘가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작곡을 지속해 나가는 데는 아내와 친구 예거의 격려와 도움이 있었고, 엘가 또한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던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침몰하는 배 안의 혼돈 속에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8명의 연주자가 있었다. 엘가는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직접 님로드를 지휘했고, 그 후 이 곡은 추모곡이나 엄숙한 행사곡으로 연주되곤 했다. 작곡의 배경과 상관없이 느리면서도 따뜻하고 장중한 분위기는 추모음악으로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곡으로 연주되기도 했었다.

나는 죽음을 자주 생각한다. 가족이나 사회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죽음, 그리고 앞으로 내게 올 죽음, 다가올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등. 나의 사랑하는 이들과 삶의 생생한 경험을 남겨 두고 가는 죽음을 상상하면 안타깝고 미어진다. 

삶에 빠져있을 때는 죽음이 멀리 있는 것 같지만, 낮과 밤, 만남과 헤어짐, 손등과 손바닥과 같이, 삶과 죽음은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가 성립될 수 없는 유기적 순환 속에 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으나, 죽음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바람이 있다면 죽음에 대해 준비해서 천천히 맞이하면 좋겠다. 나지막한 햇살이 창으로 들어올 때, 사랑하는 이들이 평안한 가운데 이 삶의 영원한 배웅을 해주면 그래도 따스하게 이 삶을 놓고 갈 수 있지 않을까? 내쉰 숨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그 순간의 끝을 바라보며 삶에 대해 여한 없이, 재미있게, 원하는 대로 잘 살았다고 스스로 만족하며 육체와 헤어지는 상상을 해본다. 

그때, 나의 귀로 사랑하는 이들의 말소리와 더불어 어떤 음악이 들리면 좋을까? 
지나온 삶의 경험을 다 녹여줄 음악, 일희일비한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음악, 인간의 나약함과 유약함도 안아주는 음악, 눈물 한 방울 흘리며 삶에 감사 인사를 하게 되는 음악, 삶뿐 아니라 죽음마저도 품어주는 음악이면 좋겠다. 
그래서 죽음을 그림자가 아니라, 빛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음악으로 안내받고 싶다. 역동적이었던 삶을 마무리하고 이 세상과 하는 마지막 안녕 인사를 아름답고 평온하게 도와주는 음악 중 하나가 ‘님로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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