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리뷰] '버닝'
[시네마 리뷰] '버닝'
  • 미용회보
  • 승인 2018.07.3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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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중심을 불태우다”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는 비어있는 것이다. 마치 비닐하우스가 비어있듯이.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관객은 그걸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심지어 그걸 믿기도 한다. 영화가 무엇인지, 세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진짜 미스터리는 거기에 있다.” -이창동 감독 인터뷰 기사중

 

 

현실은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한복판이다. 날벌레가 달라붙는 후덥지근한 공기로 가득 차 있다. 한낮에도 실내는 어둑하다. 빛은 가끔 반사되듯 안으로 들어왔다 사라질 뿐이다. 영화 <버닝>이 제시하는 현실이다. 현실의 무력감과 알 수 없는 분노는 서사가 진행되며 차곡차곡 쌓이며 마지막의 폭발로 향한다.
종수(유아인)는 택배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설을 쓰고자 한다. 종수는 배달을 갔다가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서 아프리카 여행을 간 동안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한다. 벤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날 해미는 사라지고, 종수는 벤을 의심한다.
영화 <버닝>은 알려진 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했다. 헛간을 태우는 사내의 서사와 미스터리한 분위기만 차용해 세 청춘의 이야기로 확장했다.
<버닝>은 이창동 감독이 젊은 세대들의 이면에 눈을 돌린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창동 감독은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 부모 세대보다 더 못 살고 힘든 최초의 세대다. 세상은 편리해졌고 세련돼졌고 깔끔해졌다. 그럼에도 개개인의 삶에는, 특히 청년의 입장에서는 희망이 없다. 그게 이 세계의 미스터리다. 요즘 세대가 품고 있는 무력감과 분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대상없는 분노를 향한 질문

이창독 감독의 말처럼 겉으로 포장된 영화의 틀은 젊은 세대의 성장담을 미스터리 방식으로 풀어낸 것처럼 보인다. 대상을 상실한 분노와 알게 모르게 눈에 띄는 계급 차이, 삼각관계 등이 얽히며 불현듯 사라진 여자를 쫓는 스릴러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비어 있는 중심처럼, 모호한 실체를 향하고 있다. 답이 없는 질문의 방식, 또는 인식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인식의 차이다. 우물과 귤, 중반부에 나오는 비닐하우스까지 이어지는 메타포는 이같은 인식과 의심, 믿음의 문제까지 건드린다. 그 중심에 종수를 놨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요 인물 중 메타포를 직접 제시하지 않는 인물은 종수뿐이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사람,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영화 <버닝>은 쓰여 지기 전의 소설처럼 보인다. 실제 주인공 종수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그래서 <버닝>은 종수가 소설을 쓰기까지의 여정일 수도 있다. 혹은 종수가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종수가 소설을 쓰기(영화 후반부 소설 쓰는 장면이 나온다)까지 만나는 해미와 벤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질문을 구체화하는 인물들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메타포의 변주도 종수의 비어있음(종수는 소설가 지망생이지만 아직 소설을 써본 사실이 없다)을 채우는 듯 보인다. 우물 비유가 대표적이다. 해미는 종수에게 우물 이야기를 꺼낸다. 어릴 적 우물에 빠진 자신을 종수가 구해줬다는 것. 그렇지만 해미의 언니는 우물은 존재하지 않았고, 해미가 이야기를 감쪽같이 잘 지어내는 아이라고 말한다.
우물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비어 있음으로 기능한다. 이는 종수와 해미가 만나는 영화 초반부, 해미의 팬터마임 비유와도 유사하다. 해미는 귤을 먹는 팬터마임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제든 귤을 먹을 수 있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
종수는 해미로부터 고양이를 맡아달라는 말을 듣고,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때 고양이가 보이지 않자, 고양이도 상상 속에만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며 없다는 걸 잊으면 되는 거냐고 묻는다.
해미가 아프리카에 가는 이유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해서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 얘기를 꺼내며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알려준다. 그냥 배가 고픈 리틀 헝거와 이를 넘어서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 해미는 없다는 걸 잊으면서 현실을 버틴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왔을 때, 해미는 종수에게 죽기는 무섭지만 자신이 연기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해미의 서사는 지금 자신은 우물에 빠진 상황과 같고,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말미의 해미가 새가 되어 추는 석양 아래서의 춤은 이를 함축해 보여준다(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지금이 가장 완벽한 하루 같다”던 그녀의 말과 달리 불에 타(역광으로 타오르는 듯, 혹은 희미하게 사라지는 듯 연출됐다)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운 춤이다. 절박함의 표현이다.

 

 

수수께끼로 가득한 세상에서 소설쓰기

해미와 달리 벤은 없다는 걸 잊는 사람이 아니다. 특별한 직업이 있는 것 같지 않지만, 강남의 고급 빌라에 살며 포르쉐를 몬다. 진지한 걸 참지 못하며 재미를 추구한다. 그는 있는 것만 믿는다. 그는 어디에나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걸 즐긴다(고 종수에게 고백한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태운다고 말한다. 이 비닐하우스도 일종의 메타포로 작용한다(종수가 해미의 실종에 벤이 관계돼 있다고 의심하는 이유기도 하다). 쓸모없는 잉여, 혹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건.
벤은 그러면서 자연의 도덕과 동시존재란 얘기를 한다. 비가 내리고 강이 넘치며 뭔가가 쓸려 내려가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동시존재의 균형.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파주에도 있고 동시에 반포에도 있다. 서울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다. 이런 벤의 말은 그가 절대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으로도 들린다. 달리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건 그저 믿는 수밖에 없다.
영화는 비닐하우스 방화 이야기가 등장한 이후 해미가 실종되며, 다른 방향으로 전환한다. 종수는 달리면서 동네의 비닐하우스를 확인하며, 벤의 뒤를 쫓는다. 종수의 의심은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텅 빈 해미의 방에서 드디어 소설을 쓴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이어진다. 이어지는 시퀀스는 마치 종수가 쓰기 시작한 소설의 장면처럼 보인다.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줌 아웃이 사용됐고, 벤의 시퀀스도 처음으로 종수가 빠져 있다(영화의 모든 장면에 종수가 있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도 벤의 시점으로 출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든 것을 불사르고 알몸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종수의 모습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등장한 영화의 첫 장면과 대비된다.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서 뭐를 쓸지 모르겠다는 종수는 어쩌면 이제 경계에 다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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