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96]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이달의 책 96]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서영민 기자
  • 승인 2019.11.07 11: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소설, 용경식 옮김, 까치 펴냄

 

사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전쟁의 참혹함을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평화란 늘 과거부터 쭉 그래왔다는 착각과 익숙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헝가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작가가 어린 시절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시작됐다. 세 개로 나누어진 소설을 읽다보면 어디까지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어디까지가 작가가 상상하는 몽상인지 헷갈리는 지점들을 만난다. 어쩌면 전쟁은 현실과 몽상의 구분을 헷갈리도록 인간을 황폐화시키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은 전쟁의 참혹함에 직면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든지 가슴을 후벼 파는 묘사로 읽는 이들을 괴롭게 하지는 않는다. 아이가 됐건 청년이 됐건 담담하게 전쟁 속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애잔함이 확 밀려오기보다는 스펀지에 물이 스미는 것처럼 가슴이 저려온다. 나는 오늘도 나라를 건국하지 못한 쿠르드족이 전쟁의 한 복판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일상을 시작했다.                서영민 홍보국장 yms@ko-ba.org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우리의 감각은 정말로 없어졌다. 아픈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다. 화상을 입고, 칼로 베이고, 고통을 받는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다. p23
▶▶ 전쟁도 그러하지만 고통이 지속되고 익숙해지면 감각이 무뎌진다. 자신이 고통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마치 타인의 고통처럼 객관화시키면서 그 고통을 극복하기도 한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p35
▶▶ 글이라면 진실을 기록하지만 말은 진실인지 진실이 아닌지를 판단하려고 하면 녹음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이미 사라져 버린 후다. 선의의 거짓말을 백색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 거짓말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익이 더 크다고 해서 백색 거짓말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가치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진실이 드러났을 때 얻는 고통과 손해는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진실이니까.

장님 역은 단지 시선을 자신의 내부로 돌리면 그만이고, 귀머거리 역은 온갖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면 그만이다. p46
▶▶ 우리는 때로는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잠을 잘 때는 누구나 장님이지 않는가? 가끔은 꿈이라는 내면의 시선이 존재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귀를 닫고 온갖 소리를 차단할 필요도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보 같은 소리! 온갖 궂은 일, 온갖 걱정에 빠져 지내는 게 여자야. 아이들 먹여 살려야지. 부상병들 돌봐야지. 당신들은 일단 전쟁만 끝나면, 모두 다 영웅이 되잖아. 죽었으면 죽어서 영웅, 살아남으면 살아서 영웅, 부상당했으면 부상당해서 영웅, 전쟁을 발명한 것도 당신들 남자들이고, 이번 전쟁도 당신들의 전쟁이야. 당신들이 원해서 그렇게 한 거야. 개똥같은 영웅들아!” p106
▶▶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간접 경험으로 살펴보면 전쟁이 발발하면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가장 고통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전쟁을 치르는 직접적 행위자는 아니지만 전쟁의 지원자가 되거나 역사적으로 정복된 곳에 남은 자들은 여자와 어린 아이들, 노인들을  전리품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인류학자들 중에는 초창기에 전쟁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빼앗기 위해서 전쟁을 했다지만 1차, 2차 세계대전을 보면 거대한 권력집단을 위한 전쟁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 남자들도 선택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

그렇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 가게 하는 것이다.
마대를 쥐고, 앞서 간 발자국을 따라간 다음, 아빠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밟고, 우리 가운데 하나만 국경을 넘어갔다.
남은 하나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p192
▶▶ 어떤 일이든지 중대한 고비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바탕이 되곤 한다. 이 소설에서 쌍둥이 소년들이 아버지라는 인물과 국경을 넘다가 지뢰가 터지고 그 중 한명만 국경을 넘는 장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소년은 마치 분신과도 같았지만 운명적으로 국경을 두고 오랜 시간 갈라서게 된다. 우리의 6.25 전쟁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들이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넌 슬퍼해야 할 일이 없겠구나?”
“네, 그래요. 저는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로 마음을 달래거든요.”
소녀가 땅에 뛰어내렸다. p205
▶▶ 누구의 삶이라도 되돌아보면 현실에서 슬픔도 있겠지만 기쁨과 희망의 불씨도 있을 것이다. 슬픔을 이겨내려면 과거의 추억이든 지금의 소소한 것들이든 기쁨을 끌어내면 된다. 그리고 내가 딛고 있는 현실 땅으로 내려서서 직면한 일들을 처리하면 된다.

“무슨 일이 있었니, 마티아스?”
이아가 말했다.
“또 다른 새로운 악몽일 뿐이야.” p307
▶▶ 우리는 우리가 꾸는 꿈의 아주 일부분만 아침에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은 세월이라는 잠을 자고 깨어나면 일부분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삶이라는 것이 파도처럼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가면서 밀려올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그런 큰 실수를 할 수 있어. 우리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긴 뒤이지.” p370
▶▶ 돌이킬 수 있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기에 그것이 실수인 것이다. 인공지능처럼 컴퓨터처럼 일정한 룰과 공식에 의해서만 무엇을 한다면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지 않은가? 실수가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우리를 더 힘들게 할 수 있고 결과는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p394
▶▶ 늘 뭔가를 끄적거리는 일이 때로는 내 자신이 성찰하고 있다는 작은 위안을 얻고자 함인지, 아니면 견디기 힘든 감정들을 토해내는 배설구인지 모를 일이다. 책이야 활자라는 필터링 과정을 한 번 거치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는 종이라는 객관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눈 앞에서 바로 펼쳐지는 행동과 표정 말 등 날것의 현실보다는 차분해진다. 
 
“생각에 깊이 빠지기 시작하면, 인생을 사랑할 수 없어.”
내 형제가 자기 지팡이로 내 턱을 들어올린다.
“생각하지 마, 저길 바라봐! 저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본 적이 있어?”
나는 눈을 뜬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p403
▶▶ 날이면 날마다 해는 서쪽으로 지고 동쪽에서 떠오른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우리의 삶의 시간이 먼지만큼 축소되더라도 해는 그렇게 뜨고 지고 있었다. 어두웠던 과거도 알 수없는 미래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가 지켜보는 이들과 나를 지켜보는 이들을 사랑하면 된다.

소년은 조서에 서명을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국경을 넘은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소년은 열여덟 살이 아니고, 열다섯 살이다.
이름은 클라우스(Claus)가 아니다. p465
▶▶ 때로는 가장 확실하게 해두려는 문서들이 오류투성일 때가 많다. 조서가 그렇고 기록된 역사책들이 그렇다. 세월이 흐르게 되면 조서나 역사책 등 가장 객관적이고 진실을 기록했다고 믿는 문서들의 오류를 바로잡기는 쉽지 않다. 그 때 당시의 상황은 사라지고 문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123 미용회관 5층
  • 대표전화 : 02-585-3351~3
  • 팩스 : 02-588-5012, 525-1637
  • 명칭 : 대한미용사회중앙회
  • 제호 : BeautyM (미용회보)
  • 대한미용사회중앙회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한미용사회중앙회.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