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 신대욱
  • 승인 2023.07.0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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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울리는 묵직한 펀치

들리지 않아도 표정으로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소리로 상대의 주먹을 피해야 하는 복서로서는 듣지 못하는 상태는 치명적이다. 선천적 청각 장애를 지닌 프로 복서 게이코(키시이 유키노)는 허물어질 것 같은 낡은 체육관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다음 시합을 준비한다. 게이코는 지속되는 피로감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민들이 쌓이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게이코는 체육관 관장에게 당분간 쉬고 싶다는 편지를 썼지만, 전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게이코는 체육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성공담 아닌, 변화하는 과정에 주목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선천적 청각 장애를 지닌 몸으로 프로 복서가 된 오가사와라 게이코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든 복싱 영화다. 복싱에 몰두하는 한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인물들 간의 관계와 소통의 순간들을 정교하게 포착했다. 장애를 딛고 프로 복서로 올라서는 과정을 그린 성공담이라기보다, 홀로 스스로를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 한발 한발 내딛는 움직임에 주목한다. 그 속에서 교감하는 사람들과의 리듬과 시간을 구축하는 데도 공을 들인다. 주인공의 감각을 드러내는 시선과 마주침, 흔들림 등을 빛과 바람 등을 통해 전달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과 달리, 영화는 소리로 가득하다. 첫 장면에서 게이코가 일기를 써내려가는 소리부터 체육관에서 줄넘기하는 소리, 샌드백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사운드가 중첩되며 주인공의 감정을 전달한다.
게이코는 경기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도, 코치의 지시도, 심판의 판정 소리도 듣지 못한다. 오로지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묵묵하게 펀치를 날리는데 집중할 뿐이다. 게이코는 고교 시절 자신의 처지로 인해 말썽을 피우기도 했지만, 복싱을 시작하고부터는 성실하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게 됐다. 매일 새벽 달리기를 하고, 낮에는 호텔 청소 일을 하면서도 저녁에는 체육관에서 훈련을 꾸준하게 반복하는 일상을 이어가며 복싱 시작 2년 만에 프로 복서가 됐다.
게이코를 붙잡아주는 이는 체육관 관장 사사키 가쓰미(미우라 도모카즈)다. 줄곧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모습이나 슬며시 펀치 자세를 잡아준다든가, 새벽 훈련 장소에 나타나 물 한잔 건네는 모습에서 따뜻함과 함께 쓸쓸함이 전해진다. 링과 체육관의 소음과 함께 감정의 리듬은 이 둘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흡사 유사 부녀 관계처럼 비친다. 운동을 쉬겠다는 편지를 차마 건네지 못한 것도 이런 관계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우연히 자신의 경기를 분석하고 있는 관장을 발견한 것도 그만둔다는 내색을 못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일 터이다. 
관장은 게이코에게 왜 방어를 하지 않고 공격만 하느냐고 묻는다. 공격에 치중하느라 맞지 않아도 될 펀치까지 허용했다면서다. 게이코는 맞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공격만 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상처받는 것에 두려워하던 게이코의 성향이 드러난 일면이다. 게이코는 같은 처지인 수어를 사용하는 청각 장애인들과의 대화에서만 웃음을 드러낼 뿐, 다른 이들에게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한다. 이 대화 이후 게이코는 서서히 변화한다. 비장애인들과 대화에서 웃는 모습이 늘어나며, 직장 동료에게도 친절하게 다가선다.

같은 시간 속, 움직이고 있는 모두를 위한 위로

서서히 변화하는 시간의 리듬에 중점을 둔 것은 복싱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일반적인 복싱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인상적인 데뷔전이나 타이틀전을 다루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복싱 장면은 두 번인데, 게이코의 전체 경기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기다. 두 번째 경기는 승리했고, 세 번째 경기는 패했다. 어쩌면 게이코의 전체 경력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감독은 의도적으로 비중이 없어 보이는 경기를 배치했다. 화려함보다 과정으로서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터이다. 선수 입장에서는 모든 경기가 어렵고 다 중요하다는 의미도 담았을지 모른다.
관장은 체육관이 문을 닫아야하는 상황에 더해 뇌경색으로 시력을 잃어 간다. 게이코는 입원한 관장을 병문안가고, 병실을 지키면서 무언가 끄적인다. 그때 병실에 들어온 관장 부인은 게이코의 노트에 관심을 보이고, 일기를 보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이코의 일기 내레이션은 영화 전체에서 특별한 감흥을 전한다. 관장 부인(센도 노부코)의 보이스오버로 들려주는 일기 내레이션은 체육관에서 홀로 연습하거나 집에서 매니큐어를 바르는 모습 등 게이코의 지나온 시간과 함께 꽤 길게 이어진다. 일기는 로드워크 10킬로, 섀도 3 라운드, 샌드백 3라운드 식으로 이어지는 훈련 일지와 함께 그때그때의 단상이 담겨 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거울 속에 비친 게이코의 모습으로 시작해 길 위에서 끝난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거울 속 장면은 일기를 쓰고 있는 게이코다. 영화 후반부 일기 내레이션으로 중요한 리듬을 주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 게이코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보다 단단해지고 있는 게이코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세 번째 경기에서 패한 후 홀로 강변에서 연습한 후 휴식을 취하는 게이코의 모습이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인사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에게 이긴 선수다. 그 선수는 저번 경기 때 실례했다고 하고는 다시 일하러 떠난다. 작업복 차림으로 봤을 때, 그녀도 게이코와 마찬가지로 복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모양이다. 영화는 얼떨결에 인사를 받은 게이코의 얼굴을 한참 보여준다. 게이코는 하던 일을 마저 해야 한다는 듯이 씩씩하게 달리기 시작한다. 마지막에서야 게이코의 눈을 제대로 보게 된다. 
영화는 집요하게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을 응시한다. 그 속에서 변화하는 감각들을 서서히 넓혀나간다. 마지막에 이르러 관객들은 게이코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보며 게이코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패배 이후에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의지다. 게이코 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두를 위한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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