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노래
브람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노래
  • 신은경
  • 승인 2023.07.0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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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감정은 전 생애를 통해 영향을 준다. 그것은 세포 속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유령처럼 떠돌다가 인간이 죽을 때까지 그 테두리 안에 삶을 가둔다. 브람스는 어떤 정서의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토록 무겁고 슬픈 음악을 썼을까? 

▲ 슈만과 클라라
▲ 슈만과 클라라

내가 느끼는 브람스는 우중충하고 했던 말 계속 반복하는 아저씨다. 학생 시절, 나의 우울도 감당하기 힘들었기에 옮아붙을 것 같은 그의 우울함을 마주하기 싫었다.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며 시적인 슈만의 음악에 반해 브람스는 할 말을 에둘러 말하느라 이리저리 길게 설명하는 산문 같이 느껴졌다. 바닥에 잠긴 그의 음악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음악이 답답하고 지루했다. 브람스는 그대로인데, 내 삶이 변했나. 브람스의 피아노를 위한 간주곡(Intermezzo)을 치면서 수면 밑으로만 끝없이 흐르고 있는 그의 노래에 내 가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두레박을 내려도 내려도 가늠할 수 없는 우물처럼, 음표마다 내려앉은 그의 그리움이 깊다. 내 마음에 브람스의 우주를 들인다.

브람스는 콘트라베이스와 호른 주자인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17살 연상인 절름발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브람스가 태어난 북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는 해가 짧은 곳이어서 그곳 갈대밭에는 쓸쓸한 기운이 가득했다. 부모의 불화는 그의 마음에 있는 태양의 빛마저도 꺼뜨렸으려나. 음악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자란 10대의 브람스는 피아노를 배워 아버지를 따라 항구 주변의 거친 식당, 때로는 매춘하는 술집을 따라다니며 피아노 연주로 돈을 벌었다. 내성적인 브람스가 사교적인 여성들과 사귀기도 했으나 결혼 직전 번번이 관계를 단절하고 독신으로 지낸 것은 이 시기 경험이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음침하고 음습한 곳을 전전하며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 했던 브람스는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경제적인 안정 욕구가 일찍 생겨났다. 

그런 브람스에게 슈만은 자신이 창간한 음악평론지 [신음악신보]를 통해 그를 세상에 알려 작곡가로 활동하게 한 은인이었다. 20세인 브람스는 슈만의 집에서 자신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했는데, 슈만은 청년을 극찬하며 아내이자 피아니스트, 작곡가인 클라라를 불러 함께 그의 연주를 듣게 했다. 그날 슈만은 일기에 ‘천재가 다녀갔다’라고 썼다. 진정한 음악가를 발견한 슈만의 흥분이 그 한 문장에서 느껴진다. 그날은 브람스에게 자신을 인정하고 삶에 큰 영향을 준 위대한 스승을 만난 날이기도 했고, 44년간 지속될 한 여인과 첫 만남이 이루어진 날이기도 했다.

▲ 젊은 시절의 브람스
▲ 젊은 시절의 브람스

청년 브람스는 슈만의 [만프레드 교향곡]을 듣고 교향곡을 작곡하기로 결심했다. 22세에 제1번 교향곡에 대한 악상을 얻고 난 7년 후 제1악장을 거의 완성하고, 그로부터 12년 후에야 나머지 악장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브람스는 그의 나이 43세에서야 드디어 제1 교향곡을 완성했다. 자그마치 2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나의 교향곡에 그는 왜 그 기나긴 시간을 썼을까. 

브람스는 두 대의 피아노에 옮겨 적은 악상을 오케스트라로 옮기려 했으나,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그가 피아노 음향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으로 바꾸어 발표했는데, 그마저도 실패한 공연이 되었다. 자신의 악상을 오케스트라로 전환하는 기술이 부족해 현악은 멜로디로, 관악은 보조적 음향으로 써서 단순하고 평범한 음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곡에 불만족스러웠던 브람스는 오케스트레이션에 자신감을 얻고서야 다시 교향곡을 새로 쓰기 시작했다. 브람스가 당시 자신의 실내악곡에 대하여 친구에게 서신으로 “이것들은 모두 교향곡에 엄숙한 얼굴로 대하기를 피하려고 한 쓸데없는 쓰레기”라고 전했다. 어릴 적 썼던 악보를 부끄러워서 모두 불태워버리기도 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신중한 완벽주의자였는지 느껴진다. 

▲ Clara Schumann 1853~
▲ Clara Schumann 1853~

그는 또한 곡을 쓸 수 없는 마음의 혼란스러움으로 작곡을 멈추기도 하였다. 브람스를 만나고 채 1년도 되지 않은 때, 슈만은 조울증과 정신질환으로 자살을 시도하며 라인강에 투신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클라라는 7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상심한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브람스는 곡을 써서 헌정했다. 하지만, 곡에 붙인 명목은 ‘슈만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였다고 한다. 14세 연상인 클라라에 대한 위로는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브람스는 근처에 머물면서 슈만 가족을 도우며 돌보았다. 스승인 슈만에 대한 신의와 클라라에 대한 애틋함 사이에서 방황하던 브람스는 제1 교향곡을 작곡하다가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브람스는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생일을 맞은 클라라를 위해 제1 교향곡의 4악장에 나오는 호른 선율에 가사를 붙였었다. “산보다 높이, 골짜기보다 깊이 행복 있어라. 당신에게 1000번의 인사를 보낸다.” 브람스는 그간의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면서 제1 교향곡을 어렵게 21년 만에 완성했다. 슈만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브람스는 클라라와 거리를 지키려고 힘겨운 노력을 했다. 

브람스는 자신의 악보를 출판하기 전에 언제나 클라라에게 먼저 보여줬다고 한다. 클라라가 뛰어난 음악가이기도 해서 그랬겠지만, 자신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는 분신을 보여줌으로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음악언어로 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브람스는 자신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을까. 클라라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한 다음 해, 브람스도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클라라를 떠나지 않았던 브람스의 사랑은 죽음으로서 끝이 난다. 

브람스가 소심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면 어땠을까. 사랑하는 이와 다른 관계를 이어나갔을까. 그는 작품에서 고전 양식의 구조를 고수하듯 보수적인 틀에 자신의 삶을 넣어 절제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틀 안에 넣은 그의 음악은 끝나도 끝나지 않은 음악이 되었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사랑은 수많은 음표를 낳았다. 악보에서야 피어날 수 있던 사랑의 언어는 영원한 도돌이표처럼 내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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