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슈만, 역경을 온몸으로 받아내다.
클라라 슈만, 역경을 온몸으로 받아내다.
  • 신은경
  • 승인 2023.09.0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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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독 100마르크
▲ 서독 100마르크

유럽의 화폐가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독일 100마르크 지폐에는 한 여인의 초상이 앞면에, 피아노가 뒷면에 새겨져 있었다. 어떤 인물이기에 여성으로 드물게 지폐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그의 이름은 클라라 슈만(1819~1896), 19세기 천재 여성 음악가로 평가받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클라라는 음악 교사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일찍이 재능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성격으로 인해 가족은 불화했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떠난 집에 어린 클라라는 아버지와 남겨졌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클라라를 성공시키려는 아버지의 욕망과 집착 덕에 클라라는 매일 피아노 연습과 작곡 공부를 혹독하게 했다. 클라라가 7세 무렵, 통제는 점점 심해져 클라라의 일기를 아버지가 대신 쓸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기대대로 클라라는 음악가로서 성공의 길을 걸었다. 9세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클라라는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와 협연하고 쇼팽이 극찬할 정도로 뛰어난 찬사를 받았다. 연주뿐 아니라 작곡에서도 능력을 보였는데, 17세에 그녀가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이 당시 최고의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지휘와 클라라의 피아노로 초연되기도 했다. 재능이 있는 클라라는 음악을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독선적인 교육방식과 연주장 안에 갇힌 채 외롭고 답답한 성장기를 겪어야 했다. 

그런 그에게 세상을 향한 유일한 돌파구이자 음악과 정서, 지적 호기심을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청년 음악가 슈만이 나타났다. 아버지 몰래 슈만과 사랑을 키우던 클라라는 아버지의 심한 반대에도 법정투쟁을 해가며 가난한 무명 작곡가 슈만과 결혼했다. 결혼한 후, 슈만은 클라라의 도움으로 창작욕을 불태우며 교향곡과 실내악곡, 가곡 등 많은 곡을 쏟아냈다. 슈만이 클라라 덕분에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하는 반면, 클라라는 계속되는 임신과 출산, 남편의 우울증 때문에 콘서트를 취소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뛰어난 두 예술가는 서로의 창작력과 연주력을 존중했지만, 동시에 시기와 좌절에 빠지게 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슈만은 자신보다 유명하고 뛰어난 아내를 질투해서 자신의 작품만을 연주하도록 요구했고, 조그만 것에도 트집을 잡아 클라라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 중 피아노 뚜껑을 닫아 손을 다치게 하기도 했다. 슈만은 작곡할 때 무척 예민했기 때문에 클라라는 피아노 연습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전성기가 될 시기에 육아와 집안일에 치이고, 연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사랑하는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슈만은 결혼 이후 클라라에게 “예술과 창작활동을 잊고 가정과 남편에 헌신하라”고 명령했다. 집안일에 무관심했던 슈만은 클라라가 많은 일상적인 집안일들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클라라는 당시 상황을 “나의 역할은 슈만이 작곡을 하고 있을 때 항상 그렇듯이 밀려있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하루에 한 시간도 낼 수가 없다”라고 일기에 남겼다.
 

▲ 클라라슈만 1853
▲ 클라라슈만 1853

 

슈만은 점점 유명해져서 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 명성을 날렸고,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가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사교적이지 않던 슈만에게 단원을 이끌어야 하는 지휘자는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가장과 예술가의 무게 사이에서 그는 압박을 받았고, 심지어 우울증이 정신 분열로 이어져 3년 뒤 지휘자 자리를 내놓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슈만의 입원으로 병원비와 가족의 생계는 클라라의 연주와 레슨에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클라라는 돈을 벌기 위해 쉼 없이 레슨하고 음악회를 기획하고 피아노를 연습해야 했다.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딸을 생각해 아버지가 보내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생계형 피아니스트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클라라는 여전히 슈만의 충실한 아내로서 또 음악가로서 헌신하며 살기를 원했다. 슈만이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당시 클라라의 심경은 “슈만의 음악을 연주하며 그의 숨결을 느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온몸이 그의 음악 속에 녹아내리는 듯하다”는 일기로 기록되어 있다.

그즈음 클라라의 삶에 젊은 천재 작곡가 브람스가 등장했다.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작품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지성과 미모와 재능을 갖춘 여인이었다. 거장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작품을 레퍼토리로 삼는 것이 브람스에겐 큰 영광이었을 것이다. 클라라에 대한 흠모는 사랑으로 바뀌어 브람스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브람스는 막내를 임신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클라라와 그의 자녀들, 병원에 있는 슈만을 정성껏 돌보았다. 하지만 클라라는 자녀의 양육비와 슈만의 병원비라는 현실 문제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연주를 해야 했다. 게다가 공연 기획과 홍보, 인쇄물과 의상과 헤어 등 모든 것을 본인이 다 신경 써야 했다. 2-3주 연주 여행을 다녀오면 온몸이 다 아프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기에 브람스의 사랑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자료기록에 따르면 클라라의 총 연주회 횟수는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한 1830년부터 죽기 5년 전까지 1300회 이상이었다고 한다. 자녀를 키우며 무리하게 활동하는 클라라를 브람스가 걱정하자, “내가 내 모든 힘을 다 쓰지 않았더라면 건강은 더 좋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소명에 생명을 걸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 때문이었을까? 무리한 연주로 그의 오른쪽 어깨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 1년 넘도록 휴식을 취할 정도였다. 그러나 육체와 정신이 강했던 그는 복귀연주를 성황리에 마치고 평생 아픈 팔을 가지고 그 뒤로도 연주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뿐 아니라, 프랑크푸르트의 콘서바토리(Hoch Conservatory)의 교수로 은퇴할 때까지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뛰어난 음악 교육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클라라는 8명의 자식 중 4명을 먼저 떠나보냈고, 남편마저 정신병원에서 떠났기에 연주회에서 늘 검은 드레스를 고집했다. 

16세의 클라라 비크

클라라는 16년의 결혼생활 동안 슈만을 사랑하며 조력자로서 그의 곁에 머물렀고, 43년간 브람스와 만나면서 가장 가까운 우정을 나누었다. 브람스의 작품을 처음 연주하면서 브람스를 알리기 시작한 피아니스트가 클라라였고, 이후 브람스가 작곡가로서 유명해지자 클라라가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역시 브람스였다.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때부터 사망한 후에도 브람스가 꾸준히 클라라와 가족을 물심양면으로 돌봤기에 클라라는 힘에 부치는 그 순간순간을 견디어나갈 수 있었다.

76세의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접한 브람스는 40시간 동안 달려왔지만 결국 임종을 지키지 못해 처절히 비통해했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가장 위대했던 가치였으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잃어버렸다.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내가 진정 사랑했던 한 여인이 오늘 땅에 묻혔다.”고 탄식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위해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하고 이후 건강이 급속하게 쇠약해져 다음 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1300회라는 연주를 하며 책임감 있게 가정을 이끌었던 클라라는 바라는 바대로 삶을 살았을까? 결혼하면서 어떤 삶을 꿈꾸었을까? 그가 현시대에 태어났다면, 혹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의 아버지가 바란 것처럼 임윤찬보다 더한 신드롬을 일으키는 피아니스트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남녀가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먼저 서고, 서로 의지하며 사는 삶이 지금 세대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을까? 클라라의 음악가로서 평탄한 삶은 결혼으로 끝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고단한 연주가의 삶은 남편의 죽음과 함께 가속화되었다. 많은 자녀들의 양육과 가슴 아픈 사망, 남편에 대한 아내로서의 보살핌과 음악가로서의 조력, 그리고 본인의 연주 활동과 레슨, 가장으로서 책임감 등은 혼자 감내하기에 벅찼을 것이다. 결혼과 더불어 연주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음에도 음악 활동을 강행했던 클라라의 열정, 그리고 사회적인 프레임으로 여성의 한계를 더 많이 제한한 19세기에 그것을 받아안고 온몸으로 지나간 클라라의 강인함이 존경스럽다. 삶의 굴곡이 나를 어떤 역경에 데려가더라도 역경 자체가 나의 삶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나의 삶임을 클라라를 통해 배운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클라라의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작품번호 21]이 오늘따라 더 절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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