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 아름다운 우직함, 리히터(1915-1997)
음악칼럼 - 아름다운 우직함, 리히터(1915-1997)
  • 신은경
  • 승인 2024.01.3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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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직함, 리히터(1915-1997)

운전할 때면 습관적으로 FM 라디오를 켠다. 어떤 음악인가에 따라 차 안의 공기는 풍선처럼 가벼워지기도 하고, 겨울날 입김처럼 따뜻해지기도 하고, 파란 하늘처럼 시원해지기도 한다. 그곳은 나만의 오디오 스튜디오다.

라디오를 켜자 단단하고 묵직한, 빠른 타건의 소리가 음악 이전에 먼저 고막에 닿았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리히터의 연주였다. 
나는 섬세하고 유려한 소리뿐 아니라, 무게감 있는 울림에 매료된다. 온몸으로 건반을 두들기는 듯한 그 소리에 반해 리히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리히터의 피아노 소리는 그의 성격을 닮았다. 소비에트 시절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네이가우스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는 정치교육과목이 필수였는데, 과목 이수를 거부해서 두 번이나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때마다 스승인 네이가우스의 간청으로 다행히 복학이 허용되어 피아노를 다시 배울 수 있었다. 리히터는 당대 소비에트의 위대한 솔리스트 중 공산당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한편, 서구에서 활동하면 물질적인 풍요를 가질 수 있었음에도 그것에 무관심했고, 1960년이 되어서야 서구에서 데뷔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설득되지 않는 것, 소신에 어긋나는 것은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자유로움은 휘둘리지 않는 힘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소리에 온전히 담겨있다.

“무릇 연주가란 하나의 실행자다. 천재적인 작품의 진실이 그를 통해 반영되는 것이다. 그는 음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악보에 담긴 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데에는 오로지 악보를 잘 보는 것만이 필요하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으로 음악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리히터
연주하는 사람들은 악보를 보고 또 본다. 그 안에 작곡가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사인들이 표기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숨어 있기도 하다. 아는 만큼 들리고 아는 만큼 연주가 된다. 리히터의 말처럼 연주가는 자신의 에고를 주장하거나 자신을 뽐내기보다는 작품 속에 자신을 녹여야 한다. 그래서 공간 가득한 음악으로 연주가와 청중이 연결되도록 말이다.

리히터는 연주가가 작곡가보다 앞으로 드러나서도 안 되지만, 뒤로 숨어도 안 된다고 하였다. 연주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연주하는 것을 그는 특히 혐오하였다.
그는 베토벤의 [3중 협주곡]을 바이올리니스트 오이스트라흐,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지휘자 카라얀과 함께 녹음했는데, 그 경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전혀 인정하지 않는 형편없는 녹음이다. 그것은 카라얀과 로스트로포비치가 한 편이 되고 오이스트라흐와 내가 다른 편이 되어 벌인 전쟁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카라얀이 무엇을 요구하든 약삭빠르게 응했다. 카라얀은 음악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고 있었다. 그건 자신을 높이기 위한 거드름이었다. 오이스트라흐도 나도 그것이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로스트로포비치는 갑자기 의견을 바꾸었다. 그는 교묘하게 첼로를 전면에 내세우려고 애썼다. 그 대목에서 첼로는 들러리 역할을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카라얀은 녹음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더는 시간이 없다며 이제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사진!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 사진을 보면 카라얀은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고 우리는 바보들처럼 미소를 짓고 있다. 얼마나 역겨운 사진인가!”
그 사진엔 카라얀은 깍은 듯한 얼굴이 돋보이도록 얼굴을 숙여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고, 나머지 연주자들은 해맑게 웃고 있어 대비된 모습에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리히터는 스스로 게으르고 수동적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선 모험적이고 독특한 면모를 볼 수 있다.
1944년 레닌그라드에서 첫 연주를 했을 때 일화이다. 그가 필하모니 홀에서 연습하고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폭탄이 쏟아졌다. 거리엔 얼어붙은 시체들이 널려있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호텔로 돌아갔다. 후에 리히터는 이 경험을 자극적인 모험이었다고 회상했다. 연습 다음 날, 홀의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하지만, 연주회는 취소되지 않았고 청중은 추운 연주회장에서 외투를 입고서 연주를 들었다. 청중은 추위를 잊어버린 채 감동받았다고 한다.
시체 사이를 긴 거구가 저벅저벅 걷는 모습이 연상된다. 또한 추위 속에서도 언 손으로 연주했을 그의 책임감과 집중력에 경외감이 든다. 나라면 홀에서 나왔을 때, 끔찍한 광경에 발을 뗄 수조차 없어 두려움 속에 연주회를 취소했을 것 같다. 안정된 환경에서도 무대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의 불안 속에서도 감동적으로 연주를 해내다니, 그 정신력이 가늠되지 않는다. 그리고 전쟁 중 연주회장을 찾고 감동을 받아간 청중의 삶 또한 경이롭다. 아마도 전쟁 중 그 공간은 아름다움과 신성함으로 뒤덮이지 않았을까.

리히터는 다른 피아니스트가 치지 않는 작품을 새롭게 발굴하여 80종의 서로 다른 음악회 프로그램을 가졌으니, 재능뿐 아니라 음악에 대한 도전이 남다름을 알 수 있다. 그의 도전은 곡목뿐 아니라 연주회장 선정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그는 장기적인 협연 스케줄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바람처럼 떠나서 바람처럼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프로그램도 장소, 분위기에 맞게 그날 정했다. 그 연주를 통해서 사례를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도 자신이 먹을 감자 하나는 있다”는 그의 생각이 놀랄 만큼 여유롭다. 
전쟁 속의 그보다 지금의 나는 얼마나 잘 먹고 안전하고 풍요를 누리고 있는가! 내가 피아노를 못 칠 이유가 없다.

피아노 소리, 성격과 외모 모두 우직해 보이는 리히터가 스스로 많이 흔들리는 사람이라 했다. 완벽한 연주로 틈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서 나온 이런 고백은 오히려 신선하게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 여림과 섬세함 없이 음악을 만들 수 없음을 음악가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삶이란 일직선이 아닌 갈지자로 흔들거리며 나선형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음악을 삶으로 가져가는 음악가는 더욱 그러하다. 흔들리더라도 자신의 결을 지키며 나아갔기에 리히터는 우직함 또한 그 삶에 새겼을 것이다. 독특한 그의 행적은 음악에 대한 진정성과 자신을 따르는 충실함에서 나왔다. 리히터의 스승 네이가우스는 “음악가는 자신을 알고 음악을 아는 사람이다”라고 얘기했다. 그런 점에서 리히터는 자신의 결로 가득한 삶을 살다간 피아니스트였다.
나는 그의 소리뿐 아니라 삶의 태도 역시 닮고 싶다. 환경이 삶을 뒤흔들고, 예민함이 자신을 괴롭히더라도 삶의 궤도 안에 있음을 감사히 여기자. 그 안에서 흔들리되 원하는 삶을 놓지 말고 나아가야겠다. 


*출처-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 수첩 (저자-브뤼노 몽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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