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이야기 1 - 면암 최익현 선생과 단발령
머리카락 이야기 1 - 면암 최익현 선생과 단발령
  • 서영민 기자
  • 승인 2018.04.3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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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를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

 

머리카락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입니다. 미용이라는 분야가 분명 기능적 요소도 갖고 있고, 예술적 요소도 갖고 있으며, 피부미용의 경우는 과학적 요소도 갖고 있습니다. 머리카락 이야기를 통해서 미용이라는 분야에서 인문학적 관점으로 생각을 확장해보고 싶었습니다.
머리카락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역사 철학 과학 등을 접하게 되고, 숨은 이야기들의 쏠쏠한 재미를 미용인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미용인들은 머리카락을 만지고 머리카락을 물들이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머리카락의 화학적 형태를 변화시키는 퍼머를 하면서 고객들과 함께 한 시간에 따른 노동의 대가로 삶을 영위할 동력을 얻습니다.                                                  

   서영민 홍보국장 yms@beautyassn.or.kr

 

 

최익현 선생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은 구한말 서양 세력이 이 땅에 물밀듯이 밀려올 때 ‘통상은 침략이다’이라는 인식하에 저항운동을 펼치고 일제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고 쓰시마에서 순국한 애국지사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최익현 선생을 떠올릴 때 “내 머리를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는 단발령을 거부한 고루한 유학자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쓰시마 섬으로 유배당해서 일본이 주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1907년 1월에 곡기를 끊어 순국하신 강직한 분이셨다는 점도 기억했으면 합니다. 선생은 경기도 포천출신인 경주 최씨로 1855년(철종 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의 스승은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이항로 선생이었고,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당시 살아있는 권력자,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등 재정파탄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려 맞서다가 삭탈관직을 당했지만 흥선대원군의 실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소를 올리고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을사의병)의 전개했습니다. 74세에 이르러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한 후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도중 일본인이 주는 식사를 거부하고 그 곳에서 스스로 굶어 죽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이미지

 

 

단발령(斷髮令)

1895년 개화파인 김홍집 내각은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습니다. 단발령의 핵심 내용은 성인남성의 상투를 자르는 것이었는데 일제의 강요로 먼저 임금인 고종이 상투를 자르고 관리들에게도 상투를 자르도록 강요했습니다.
조선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교 국가였고, 효(孝)는 사회 규범이자 나라의 법도이기도 했습니다. 공자는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신체발부 수지부모 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감훼상 不敢毁傷, 효지시야 孝之始也).”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기고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자존을 지키는 도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성인 남자에게 상투의 의미는 남달랐습니다. 머리카락은 자라도록 가만히 놔두면 더벅머리나 장발이 됩니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는데 부모가 주신 소중한 머리카락이 자라나면 아이들은 남녀 모두 댕기를 땋아 단정하게 정리했습니다.
성인의 여자들은 쪽을 만들어 단아하게 올리고, 남자들은 머리털을 끌어올려 정수리 위에 삐쭉하게 틀어 감아 맸는데 이것이 상투입니다. 보통 장가를 가게 되면 상투를 틀고 상투를 튼 다는 것은 성인 남성으로서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투를 자르라니! 그것도 나라의 명령이 단발령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단발령에 저항했을까?

상투가 뭐 길래?
최익현 선생은 “내 머리를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목숨을 걸고 저항했을까요? 고루한 유학자여서, 아니면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유교적 가르침에 충실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측면도 있었겠지만 또 다른 이면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다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개항을 반대했는데 간단하게 살펴보면 일본의 강요에 의한 조약을 맺으면 일본의 노예가 된다는 것, 공산품과 수공업품 농산물이 교환되는 경제로 가면 경제가 망한다는 것, 서양과 일본은 똑같이 나쁜 놈이라는 왜양일체론, 일본인의 부녀자 능욕 등 풍속교란, 일본 프랑스 미국 등의 사람들을 짐승으로 보는 인수지별론 등이었습니다.
다른 관점은 다 차치하고라도 현대적 관점에서도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예상한 것은 선생의 탁월한 식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가 단발령을 홍보하기 위해서 찍은 고종임금의 사진 한 장이 많은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사진 속에서 고종은 수염은 길렀지만 상투를 자른 모습이었고,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단정하게 앉아 있습니다.
최익현 선생이 납세 거부운동이나 철도 이용 안하기,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벌인 것만 보더라도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단발령의 후폭풍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계셨다고 판단됩니다.
상투를 자른 부유한 사대부 계급들이 갖바치가 만든 가죽신을 버리고 구두를 신고, 조선의 아낙들이 한 땀 한 땀 지었던 도포를 버리고 양복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모두 산업화를 먼저 이룩한 일제가 공급하는 공산품에 의해 경제가 예속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양복과 구두는 밤을 새워서도 만들 수 있고 공장을 더 크게 지으면 생산량을 늘릴 수도 있지만, 이것들과 교환되는 조선의 쌀은 일 년을 기다려야 생산이 되고, 생산량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헤어스타일을 바꾸면 거기에 맞는 옷과 신발을 구매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상투를 자르는 변화는 경제적으로 국가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조선의 부자들이 양복과 구두를 사기 위해서 지불하는 재화는 쌀이었던 만큼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은 더 귀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연이 조선의 농업이 피해져 가는 무역구조이고 연이어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양에 머물던 지방 사람들은 단발령을 피해 귀향을 서둘렀으며, 강제로 상투가 잘린 사람들은 상투를 버리지 못하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한양뿐만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체두관(剃頭官)이 파견되어 길거리에서나 민가에서 단발이 강행되어 백성들의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에서 그랬더라면….

“너 무슨 일 있니?” 긴 머리스타일을 짧게 커트하고 친구들의 모임을 가면 아직도 많이 듣는 말입니다.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행위가 큰 결심을 하거나 심경의 변화가 있거나, 아니면 내 자신 스스로가 타인에게 변화를 추구하려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 삭발을 하기도 하는데 강력한 투쟁 의지를 보일 때 삭발을 감행하고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불가에 귀의하는 스님들도 삭발을 합니다.
최익현 선생에게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조선의 경제구조가 무너진다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그렇게 자를 수 없다고 저항했을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정(假定), ‘그랬더라면’은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조선의 국왕들이나 리더들이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으로 격동하는 서양의 동향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고 냉정하게 인식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조선 스스로가 영정조시대의 실학을 발전시키고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개화기를 준비했더라면, 분명 역사는 달라졌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관객들이 많이 찾는 일본의 관광지에는 쓰시마 섬이 순위에 들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시마 섬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최익현 선생을 기억할까요? 그 섬에서 일본이 주는 곡기를 먹을 수 없다며 거부하고 스스로 굶어 죽은 최익현 선생의 역사를  되돌아봤으면 합니다. 최익현 선생이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지는 않았겠지만 개항이후 우리나라는 일본과 무역을 하면서 흑자를 기록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IT 관련 고가의 장비나 고가의 기계설비 부문에서 일본의 기술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2018년을 기준으로 보면 일본에 대한 무역적자와 더불어 여행수지 적자 또한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최익현 선생이 상투를 통해서 지키고자 했던 가치, 자신의 몸을 소중히 생각하고 인간을 고귀하게 여기는 정신, 산업발전 격차라는 불균형에 따른 경제적 예속을 걱정하는 외침이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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